최기훈(민영 소망교도소 교도관)

내게 40년이라는 숫자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낯익지만 짐짓 뜨악한 친구처럼 말이다. 최근에 나는 묵은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파일북에서 유독 눈에 띈 통지서를 발견했다. 1981530일 자, 총무처장관이 발행한 ‘5급 을류 교정직 국가공무원 합격통지서였다. 그해 728일 우체부가 배달해 준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사진과 서류를 준비하여 영등포구치소를 찾아갔다. 시험을 보고 불과 석 달도 안 되어 법무연수원 교육도 받지 않은 채 곧바로 임용되었다. 730, 그날부터 교도관이 된 것이다. 그렇게 국영에서 293개월, 민영 소망교도소에서 올해 8월 말이면 109개월이니 더해서 꼬박 40년이다. 돌아보니 내 젊음과 중년을 송두리째 바쳤다. 생각할수록 은총의 세월이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나는 그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은 명칭이 남부구치소로 바뀌었지만 서울시 고척동에 있는 영등포구치소는 결코 잊지 못하는 일과 삶의 자리였다. 그곳을 떠나오던 날, 청사와 외부 정문 사이에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박수로 앞날을 축복해 주던 동료, 후배들을 보노라니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명예 퇴임 사흘을 앞두고 나는 직원들에게 짧지 않은 석별의 편지를 법무샘 게시판에 올렸다. 제목은 서른 해, 벅찬 꿈을 꾸었습니다!”였다.

소망교도소 전경
소망교도소 전경

서른 해, 벅찬 꿈을 꾸었습니다!

정문 앞 느티나무 잎사귀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한 잎 두 잎 지겠지요. 그 느티나무를 자신이 심었다고 하던 부지런하고 자상했던 한 선배가 생각납니다. 직장에서 자신이 한 일 중에 느티나무를 심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선배가 퇴직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은 듯합니다. 그 선배의 넉넉한 마음씨만큼이나 느티나무는 한철 푸른 가지를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오가는 이들에게 무더위를 식혀 주었습니다.

이제 저도 이십 대에서 오십 대까지 온몸을 바친 정든 이 직장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묵묵히 지지해 준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아들의 얼굴도 그려집니다. 그동안 솔직히 눈물 날 때가 더러 있었지만 꾹 참고 참았습니다. 교도관이란 직업이 그리 녹록지 않은 길이기에 내가 품은 꿈과 사랑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 근무 현장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짠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순전히 자기 연민의 감정에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은 감사와 기쁨의 눈물입니다.

이십구 년 삼 개월, 교도관 제복을 처음 입던 날을 기억합니다. 팔십일 년 칠 월 삼십 일, 고향인 충남 태안에서 임용 전보 쪽지를 받고 여름 바지가 없어서 두꺼운 겨울 바지를 입은 채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첫날 허름한 기동복 한 벌을 받아 입고 임용 신고를 했습니다. 수용 거실에선 왜 그리 역한 냄새가 나던지요. 지금은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그 냄새마저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팔십 년대 초반, 그 시절만 해도 권위보다는 권위주의가 드러나고 본질보다는 비본질이 표면화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교도관의 사명을 스스로 외칠 수 없을 만큼 소심했던 지라 동료 크리스천 교도관들과 신우회를 만들어 수용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은 나로 하여금 교도관의 진정한 꿈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절망에 처한 수용자들에게 다가가 4영리로 복음을 전하고 영접시킬 때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기쁨이었기에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넘치곤 하였습니다.

그 후 십 년이 지날 무렵 저는 신우회장이 되어 마침내 전국 교정기관 신우회를 하나로 묶는 법무부교정연합기독선교회를 결성할 수 있었고 그 사역에 앞장섰던 기억이 퍽 자랑스럽습니다. 또 하나 2005년부터는 두란노아버지학교를 수료하고 교도소아버지학교를 통한 성경적인 남성 회복, 가정 회복이야말로 담장 안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섬김의 운동으로 순명(順命)처럼 여겼기에 그 사역자로 나선 것이 정말이지 긍지를 느낄 만한 보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 남매의 맏이였던 저는 교도관이라는 직업을 통하여 미력하나마 동생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짝을 만나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아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선 장로가 되었고 어렵사리 내 집도 장만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가장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함께하시며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립니다.

돌이켜보니 유독 기억할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첫 월급, 십사만 이천 원을 받아 몽땅 고향 모교회에 첫 열매로 헌금했던 일, 대학 공부를 하고 싶어 어렵사리 오 년에 걸친 방송대학과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석사 학위를 받은 일, 글쓰기를 좋아하여 교도관의 교양 잡지인 월간 교정에 투고하여 게재된 글만도 무려 80여 편, T.V와 방송에도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일간 신문과 잡지 등에도 기고하여 교도관의 따뜻한 이미지를 심고자 많은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한 등단(登壇)의 기쁨도 찾아왔습니다.

정작 소중하고 보람 있었던 일은 구십 년부터 십오 년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과 꿈을 심는 민들레편지를 만든 일입니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과 더불어 무기수를 비롯한 장기수들에게 매월 수백 통씩 풀칠하여 보내던 일은 정말이지 교도관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작은 아들이 학교 선생님 앞에서 아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여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어린이들 앞에서 직업 특강을 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기만 합니다. 저는 그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직업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 주고 나아가 감동을 주는 일이라면 소명(召命)이라 일컬을 수 있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강의가 끝났을 때 많은 어린이들이 박수를 치며 응답했습니다. ‘저도 교도관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입니다.

떠나는 이야기가 꽤 길어졌습니다. 마음 같아선 구구절절 사랑하는 후배들을 위하여 글을 더 이어가고 싶지만 괜한 번거로움인 듯 싶어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글을 마치려 하니 저의 부끄러웠던 모습들도 시나브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더러 아픔과 서운함이 있었다면 그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애오라지 사랑의 빚만 가슴에 가득 안고 떠나겠습니다. 끝으로 직원 여러분과 가정에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도하며 복을 빌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만약 나의 직업이 나를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의 직업을 영화롭게 하리라!” (토마스 칼라일)

20101028
낙엽 지는 날, 정든 직장 영등포구치소를 떠나며
최기훈 올림

(추신) 이제 저는 여기 소망의 동산, 아가페 랜드에서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 소망교도소는 복음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신실하고 겸손한 지체 노릇, 끝까지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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