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순(캘리포니아)

일 년에 두 번 하는 정기 검진. 늘 편하게 일상 이야기를 해가며 진단하던 의사가 이번엔 왼쪽 갑상선이 좀 부었다며 고개를 갸웃하곤 꼼꼼히 살폈다. 한참을 살피더니 초음파 검사를 해야겠다고 했다.

생전 처음 하게 된 초음파검사! 충격이었다. 며칠 동안 내 몸 안에 필요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 혹 그 뭔가가 크게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라는 단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려 했다. 침착하고 싶어도 최악의 결과가 불쑥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방정맞음, 일손이 잡히지 않고 심란하기만 했다.

안절부절못한 시간을 보내다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았다. 육십도 중반, 허망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 지난날들. 자책과 후회로 시간을 허비한 며칠이었다.

이윽고 검사하는 날이 왔다. 예약된 시간보다 십여 분 일찍 방사선과에 들어갔다. 마음과 발걸음이 천근이었다. 대기실에는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펜데믹 기간이 만든 풍경이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 모두 두려움이 만든 모습들일까? 움직임도 없이, 오뚝하니 앉아 있는 멍한 모습들은 한 장의 사진 같았다.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동네답게 유색인종은 나 하나였다. 여기저기서 인종차별 뉴스를 쏟아내는 요즈음, 난 그들보다 두려움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와중에 곧 이상한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일 분의 짬, 아니 언제 어디서나 습관적으로 손 안의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세상이 되어 버린 21세기.

그런데 거긴 20세기의 풍경을 연출하는 듯했다. 잡지를 손에 든 몇 사람이 있었고, 모두 전화 없이 앉아있었다.

곧 그 이유를 알아냈다. 사람들의 눈높이 정도의 벽에는 군데군데 전화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내 전화기도 가방 안에 넣어야 했다.

여러 사람이 만졌을 잡지, 물론 소독 처리를 했겠지만 만지고 싶지 않았다. 펜데믹 기간에 익힌 습관 중의 하나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도 멍 군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불안과 걱정이 정복해 버린 머릿속, 날아가 버린다고 표현했던 시간은 왜 그렇게 더디 가는지. 기껏해야 십여 분이었을 텐데.

드디어 접수하는 곳에서 적막을 뚫고 내 이름을 불렀다. 유리막 저쪽에서 굼실거리는 머리의 젊은 여자가 미소로 나를 맞았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모래밭에서 찾아낸 싱싱한 풀포기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해맑은 미소.

서류 접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유리막 한쪽에 놓인 작은 액자가 보였다. 맨 꼭대기엔 익살맞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색한 테디 베어가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당신에겐 날마다 황금의 24시간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세상의 모든 돈을 주고도 한순간의 여분도 살 수 없는 황금의 시간. 당신은 이 보석을 지금 성공 또는 실패로 만들 수 있다. 기억해야 한다. 지나가 버리는 황금의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나를 찌르는 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며칠 동안 허비한 내 시간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리라던, 얼마 전 진실한 성도로서의 내 결단도 떠올랐다. 염려에 밀려 기도조차 소홀했던 내가 보였다. 귀한 시간을 허비한 형편없는 나의 모습, 그 문장에 힘을 얻은 양심이 아프게 나를 흘겨보는 듯했다.

또 한 번,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한 나를 바로잡아 주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멋진 문장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몇 분 만에 외울 수가 없었다. 해맑은 여자에게 전화기로 액자를 찍어도 괜찮은지를 물었다.

나를 향해 다시 환하게 웃던 그 여자, 잠깐 기다리라며 서류 일을 마쳤다. 액자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빼내더니 급하게 카피를 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작은 펜 통에서 보라색과 오렌지 펜을 꺼냈다. 테디 베어 모자의 리본과 보우타이에는 보라색. 코와 배에는 오렌지색을 칠하고 있질 않은가!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 침착하고 정성스럽게 칠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정말 짧은 시간이 만든 작은 행동의 위력은 대단했다, 난 그만 흐물흐물 행복감에 빠져버렸고, 쳐부술 수 없이 굳건하던 적군은 어느새 정복당해 버렸다.

일 분도 안 되는 그녀의 짧은 시간, 그날 불행의 길에서 행복의 길로 갈아타는 데 소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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