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교회가 부패하면 세상이 부패한다.”

작고하신 유명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어떤 분의 글에서 이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이 내용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내용이 그 목사님의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이기 때문이다이런 교회와 세상 이해가 불식되어야 한다!

생각을 해보자. 교회가 부패하지 않으면 세상이 부패하지 않는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 세상의 부패가 교회의 부패와 연동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이해가 복음의 진위를 가른다.

이 말씀을 하신 목사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부패하지 않으면 세상이 부패하지 않는가아니다. 아무리 교회가 청정해도 세상은 부패한다. 세상은 교회의 부패 여부와 관계없이 부패하는 곳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 부패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서가 말하는 세상 부패의 의미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세상의 부패는 물론 죄악이 관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 이해하는 죄악과 성서가 지적하는 죄악의 의미는 다르다세상은 세상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죄악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성서는 희생의 체제인 세상 자체를 죄악으로 인식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유명한 목사님은 복음주의 4인방 가운데 한 분이시다. 복음주의 4인방 목사님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는 분들이시다. 그런 분들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 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을 금기시하는 한국교회들에서도 이분들 4인방의 설교는 꾸준히 다른 교회 교인들에게도 울려 퍼졌다.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이해가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것이다.

성서는 세상을 권세로 인식한다. 권세란 힘으로 통치하는 권력을 가진 곳으로 반드시 희생의 체제가 된다. 희생의 체제란 전체 혹은 일부를 위해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한 구조를 말한다. 성서가 지적하는 죄악이란 바로 그 희생양들의 존재와 관련된다, 하나님 나라란 그런 희생양들이 사라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부패하는 곳이 아니라 부패 그 자체이다.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드러내 보여주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보고 세상이 잘못된 곳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부패 자체가 없는 곳이다. 희생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희생되거나 희생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다교회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교회를 하나님 나라인 교회라고 말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소금과 빛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역할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세상은 부패 그 자체인 곳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자체로 세상의 부패는 지연되거나 방지될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복음 이해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대로 오늘날 교회가 부패했다. 교회가 부패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교회도 세상처럼 희생의 체제가 되었다는 것이다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의 건축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회 건물의 건축을 하나님 나라 건설과 거의 동일시한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교회 건물의 건축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고는 견고하다. 그런데 교회 건물의 건축이 하나님의 일인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인가.

이에 대한 이해가 정말 중요하다. 교회 건물의 건축은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될 수도 있고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의 건축이 세상의 죄악 된 구조인 희생의 체제를 허무는 일에 일조하고 있는가. 그 대답을 교회가 부패하면 세상이 부패한다고 말하는 그 목사님이 대답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 특히 개신교 교회들은 견고한 에녹성이다. 에덴을 떠난 가인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을 지은 것이다. 가인은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 지었다. 아들의 이름도 에녹이라 지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가인도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노력의 결정체인 성에도 그의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에게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녹이란 봉헌된 또는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을 자가당착 혹은 아전인수라고 한다.

감히 말하지만, 오늘날 교회 건물은 이런 의미의 에녹 성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평화의 나라이다. 오늘날 교회를 통해 그런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러려면 최소한 공동의 소유라는 경제 방식이 작동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을 거두어 목사의 배를 채우고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목사 이외에 교인들의 생계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결국 교회 역시 세상과 마찬가지로 희생의 체제가 된 것이다.

교회가 희생의 체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유명한 목사님께서 교회가 부패하면 세상이 부패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같은 희생의 체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곳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교회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하부구조가 된 교회는 결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부패하든 안 하든 교회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형제애에서 비롯되는 공동의 소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진 한마음,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 통치의 증거임과 동시에 성령의 보호하심이다.

성서가 말하는 교회란 산 위의 동네이다. 산 위의 동네란 멀리서도 보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빛이 나와 어두운 세상을 드러낸다. 세상이 죄악이 관영한 곳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나오는 빛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산 위의 동네인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져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일상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세상은 부패한 곳이다. 그것을 교회가 자신을 태워 내는 빛으로 밝히 드러낸다. 그 빛은 하나님 나라다. 세상이 당연한 곳이 아니다. 희생양이 반드시 있어야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교회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 빛을 보고 세상이 어두운 곳이었으며 죄악 된 곳임을 알게 된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불가능하게 보였던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선교이며 전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이해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될 때 세상의 부패가 드러난다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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