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을 구하며 마지막으로 기도한 때가 언제였나?"

오늘은 놓치기 쉬운 특이한 소식들로 시작하자.

지난 926, 쿼드 시티스 마라톤 대회에서 1,2위를 다투던 케냐 선수들이 마라톤 코스를 이탈하는 바람에 실격하고, 일리노이 주 출신의 타일러 펜스(28)가 우승했다. 자전거를 타고 안내자 역할을 하던 자원봉사자가 방향 전환 지점에서 직진하는 바람에 케냐 선수 사올로와 키벳이 마라톤 코스를 벗어나게 되었다.

27,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버크헤드에서 잡초 제거를 위해 크로거 슈퍼마켓이 데려온 염소떼가  도로 위를 배회하여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들은 결국 붙잡혀서 치워졌다.

로마에서도 야생 멧돼지들이 도시에 침입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일부 공원에서는 멧돼지 사냥을 선택적으로 허용하는 새로운 법령이 승인되었다.

어제는 전국 커피의 날이었다. 내일은 세계 커피의 날이다.

이런 소식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일시적인 현상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당신은 마라톤 코스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우승하고 있다. 염소떼와 야생 멧돼지들이 당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일상을 방해할 수 있다. 연례행사는 왔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가능한 전부이다. 신경과학자 아비짓 나스카르는 시간은 광대한 우주의 바다에서 시각적 현존의 감각을 돕기 위해 마음이 창조한 환상이다. 모든 경험에 기초한 과거와 미래의 인식을 창조하는 뉴런이 없다면, 과거와 미래의 실재는 없다. 현재만 있다.”라고 했다.

오늘은 변화무쌍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에 대해 묵상해 보자.

행복"(이 단어는 1520년대에 최초로 사용되었고 행운을 의미했다)은 사건에 의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적 기쁨은 내적인 평온과 만족으로 인생의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라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5:22),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결과이다(5:18). 성령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12:2)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빚고 계신다(8:29).

우리는 영원한 기쁨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 타락한 세상이 제공하는 것은 모두 일시적인 행복이다.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4:4), 다른 사람들이 알아챈다. 우리가 한밤중에 감옥에서 찬송하면 다른 죄수들이 듣는다(16:25).

주님의 기쁨은 세속적인 문화에서 특히 강력하다. 행복은 기쁨에 필적할 수 없다.

엄청난 고통과 시련 속에서 예수의 기쁨을 보여 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유방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예배를 멈추지 않았던 친구, 사망 전날까지 주님 안에서 기뻐하시던 영적 멘토, 생명을 위협하는 수술을 받으러 가면서도 나를 향해 기쁨의 미소를 지으신 연로한 아버지와 끔찍한 화학요법을 받는 동안 기쁨을 잃지 않았던 친구가 기억난다.

예수님의 기쁨을 누리는 열쇠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저 지옥에서 구해 주신 구주 혹은 성경 공부나 설교의 주제가 아니다. 그저 역사적 인물 혹은 교리가 아니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가 매일 매순간 당신의 임재 안에 거하길원하시는 분이다(15:4-5).

우리가 장애물들을 예수님의 평강과 능력을 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4:6-7), 우리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행복한 상황을 예수님께 감사하는 기회로 여기다면(살전 5:18),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것이다(100:2). 이것이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다”(16:11)라고 다윗이 고백한 이유이다.

영생과 주님의 기쁨은 우리가 미래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때만 받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재를 위한 선물이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당신의 영생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로 믿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 결과 당신은 오늘 새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 어떻게 될까를 궁금해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다. 나의 분명한 목표가 영생일 때, 바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영생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영생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며,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삶-하나님 안의 삶-의 위대한 신비는 나중에 일어날 일이라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영생은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이다.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에서의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 즉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기쁨을 우리의 삶에 나타내 주십사 요청하면 예수님은 응답하실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5). 다른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들의 영혼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기쁨을 보게 될 것이다. 세속 문화에 젖은 사람들은 세속 문화 속에서 주님이 주도하시는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인 성령께로 이끌릴 것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하며 마지막으로 기도한 때가 언제였나?
오늘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 편집자 주: 문화사력자 짐 데니슨 밖사의 9월 30일 칼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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