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목사(어지니 교회)

사람들의 글에 “오징어 게임”이 많이 등장해서 그 영화를 보았다.

목사는 책 읽는 것이 순교라는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그런데 한동안 책을 사볼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다. 그래도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사한 후 도서관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출판사에서 가끔 보내 주는 책들이나 서가에 꽂힌 책들을 다시 읽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책 읽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었고 지금은 오래 책에 집중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사라졌다.

그럴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 한편의 숙제 같은 것으로 남게 되었다. 오락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부담으로 다가온다. 특히 시리즈물을 보면 무언가 죄를 짓는 것같이 찜찜하다. 

예전 책을 많이 읽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설교도 많이 했다. 교인들에게 특정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 한 후에 설교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티브이를 바보  상자로 보지 않는다. 드라마 작가가 목사보다 더 날카롭게 현실을 본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세태를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 손에 성서를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칼 바르트의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였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요원하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출가(出家)가 아니라 '출애굽(Exodus, 여기서 애굽은 세상이다)'을 요구한다.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세상에서 탈출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애굽’을 해야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도 40년 광야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죽는 날까지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넘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는 날까지 앞의 푯대를 바라보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은퇴가 없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장례식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자신보다 더 많이 비운 사람을 보면 분발해야 하고, 자신보다 덜 비운 사람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보다 드라마나 영화가 더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징어 게임'이란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내 눈에는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것이 잔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처참했다.  244번은 하는 짓으로 보아 목사로 보인다. 그는 줄다리기에서 이긴 후 연신 기도를 드린다. 죽기 전까지 그는 계속 기도를 드린다. 줄다리기 승리 후 감사기도를 드리는 244번에게 지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산 게 주님 덕분인 것 같아? 당신이 지금 살아서 혀를 놀리고 있는 건 저 할아버지랑 막판에 기가 막히게 잔머리 굴리신 저 아저씨 덕분이라구. 그러니까 감사기도 할 거면 저 사람들한테나 해.” 

이런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이 얼마 후 밝혀진다. 강새벽과의 대화에서 지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엄마를 때리다 잔인하게 죽였다고 말한다. 더구나 지영에게 성폭행을 일삼은 것으로 보인다. 오징어 게임 작가는  244번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244번은 늘 진지하게 기도한다.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분노할 수 있다.(많은 교인들이 그럴 것이다) 극히 일부만 그렇다고 에둘러갈 수도 있다.(거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고 어떻게 그렇게 한심하냐고, 작가에게 잘 지적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성폭력 예방 교육’이 목사  후보생 이수 교과과목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작가의 조롱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기훈(이정재 분)이 최종 승자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 천국, 불신지옥”이 또 등장한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 오는 길바닥에 누워 있는 기훈에게 다가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 한 마디만 한다. 참으로 비참한 개신교의 현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보는 바로 그 모습을 그리스도인들이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나는 오늘 페친의 창에서 글 하나를 보았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어리석음 / 바꿀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평온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나태함 /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은 용기!
평온함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얼핏 보면 좋은 기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기도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비슷한 유(類)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이 성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페친의 이 기도가 전형적인 인본주의 사고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어리석음과 평온함, 나태함과 용기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정치가들에게 맡기자. 그리스도인들은 바꿀 수 없는 것에 도전하자. 그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은 대장동 사건으로 시끄럽다. 50억 퇴직금을 받은 곽상도의 아들은 자신이 오징어 게임의 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의 말은 그 게임을 주도하는 부자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의 말들은 모두 스스로 말의 역할을 택했다. 심지어 말의 역할을 거듭 택했다.

'오징어 게임' 영화는 돈이 주인 된 세상을 풍자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기꺼이 말이 된다. 그 설정이 절묘하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세상에서 말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말이 되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소금과 빛이 되고, 교회는 산위의 동네가 될 수 있다. 세상의 말이 되기를 거부하는 일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는 어리석음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출애굽'한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페친의 기도를 이렇게 바꾸어 드리고 싶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어리석음 /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나태함 /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은 평온함!
어리석음과 나태함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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