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 (13)

임태집 목사(로고스선교회 협동 목사)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를 나타낸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그 사람의 존재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기에 성경에서도 이름에 대한 가치를 중요시한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특별했다.

과거 유대 서기관들은 성경을 손으로 필사할 때, 하나님의 이름만을 기록하는 전용 붓으로 기록하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읽을 때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십계명을 두려워하여, “하쉠”이라고 하는 “그분의 이름”이라는 뜻의 말로 대신하여 읽었다.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그 형태가 복수이면서도, 단수로 취급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실제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출 3:4)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출 3:13)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스스로 있는 자’는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는 말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7가지 선언 ‘나는…. 이다’의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히브리 표현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 나다’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시기에 그의 이름 또한 완전하다. 그의 이름의 ‘나는 나다’는 존재의 대표성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가 이름이 되는 것은 존재의 근원 되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은 히브리어로 사람과 남자를 동시에 뜻하는 일반명사이다. 아담의 어원은 히브리어의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Adamah)로 흙과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흙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의 대표임을 말해 준다. 또 한 가지 예로 영어 성경을 말하는 바이블(The Bible)은 그리스어의 ‘비블로스’(biblos)에서 나온 ‘책’(Book)을 의미한다. 책이라는 명사가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책들 중의 책이라는 대표성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는 나다’라는 의미에는 ‘나’라는 존재의 대표와 근원을 담고 있으며, 완전한 존재자 되심을 말해 준다. 그 완전자를 향하여 예수님의 주기도문 첫 간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말 1:6-7).

그 거룩한 또 다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를 헬라어로 옮겨 적은 발음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1세기 전반까지 흔한 이름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버지나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눅 1:61).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어느 여인의 상속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남편의 이름도 예수, 시부의 이름도 예수, 아들의 이름도 예수였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 중에는 약 20명의 예수 이름을 가진 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 with)과 ‘마누’(우리와, us)와 ‘엘’(하나님, God)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분의 이름대로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셨다. 

히브리서 1:3의 말씀대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를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고 메시야를 표현하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어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존귀를 입으셨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라는 노래처럼 예수의 이름이 아주 흔하고 평범하였지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존귀한 이름이 되신 것이다(빌 2:9). 그리고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 16:23-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말씀을 주셔서 과거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감히 부를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 이름이 흔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해서 구하지 않았던 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도록 하셨다.

김춘수의 시 ‘꽃’은 이름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죄인 된 존재이기에 이름도 그 의미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하나님이 불러 주지 않은 이상 무의미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이 시를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죄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로 와서 그의 자녀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셔서 우리를 그분에게 합당한 존재로 만드셨다. 부름은 모든 일과 사건의 시작이다. 부름이 사건을 만들어 그 이름을 부른 자의 의미가 되고, 그 이름의 존재가 된다.

‘꽃’ 시는 이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는 그분 또한 내가 하나님에 합당한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요한복음 14:13-14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는 말씀을 토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어지고 이는 하나님으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을 부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충만케 함이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함이 기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3:17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과 사역 모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요, 참된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이름으로 행할 때 그의 이름대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이름의 존재가 되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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