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지금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으로 이사 오자마자 일곱 집에 떡을 돌렸다. 이사 온 다세대주택에는 여덟 가정이 살고 있다. 그런데 떡을 받은 일곱 집 가운데 인사를 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한 집이 하나도 없다. 계단이나 현관에서 만나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지난 6년 동안 계속 노력했지만, 아직도 세 집에 사는 분들과는 인사하지 않고 지낸다.

집주인들과는 인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세 들어 사는 사람들과 인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젊은이들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주차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전쟁 불사의 자세가 대부분이다.

새삼 세상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에선 날마다 주차 전쟁이 일어나고 방문객이 타고 온 차가 있어 전화를 걸게 되면 불안해진다. 서로를 배려하고 조금만 이해하고 양보하면 되는데 그게 참 어렵다. 그래도 지난 6년간 거의 미친 사람처럼 인사하고 다녀서 집주인들의 얼굴은 알게 되었는데 집주인들에게 인사하면 뒷짐을 지고 인사를 받는다. 나를 지칭할 때도 김씨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온 뒤 가장 힘들고 재미없는 것은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알루미늄 깡통을 모아두었다가 깡통 모으는 분을 만나면 말을 걸고 그동안 모아둔 깡통을 드리기도 하고 버리는 옷가지 모아둔 것을 드리기도 한다. 양이 많지 않으면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면서 만 원짜리를 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많이 사면 값싼 채소나 물품이 있는데, 나눌 이웃이 없어서 살 수가 없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선 나눌 수 있었다. 교인들도 있었지만, 교인이 아니더라도 인사하며 지내던 분들과 그런 나눔을 하면 그분들이 나중에 더 좋은 것을 가져오기도 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받기 위해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온 후에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 시도조차 안 한 것은 아니다. 이전처럼 문고리에 봉지를 걸어두고 사연 적은 쪽지를 넣어 두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나를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최근 들어 세 집 떨어진 곳에 딸아이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후배가 있어 몇 번 음식을 담아다 주었다. 그 후배가 고향에서 보내온 것이라면서 과일과 와인을 보냈다. 마침 추석이라 얼른 추석 음식을 보내 주었더니 맛있게 먹었다는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매주 가던 노인요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노인들의 손을 잡아드리면 노인들이 나를 귀여워해 주신다. 기도를 하고 말을 걸어드리면 아주 좋아하신다. 아니 행복해하신다. 그 일마저 중단되니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나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지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하겠다는 열정이 더욱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주님의 손길이 안 미친 곳이 없다. 내가 가난과 비능력이라는 두 개의 신앙 기둥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주님의 손길이 나를 인도하신 결과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이끄셨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겪어보니 고립은 정말 힘들고 슬픈 일이다. 무시를 당해도 관계가 있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주님은 고립이 얼마나 힘들고 슬픈 일인가를 이곳에 이사 와서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주님의 인도하심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내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있다고 해도 나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아내는 이런 나를 무척 답답해한다. 아내는 날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할 일이 없으면 집을 닦고 또 닦는다. 그런 아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못 견디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귀를 기울인다. 주님이 내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내면의 소리를 죽인다. 주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신다. 내가 하는 일을 주님의 일이라 착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저지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이다.

순간적이라도 주의가 흐려지는 순간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재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주소지로 가려고 전철을 타러 가는 중이었다. 내 앞에 어떤 사람이 양손에 짐을 들고 전철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사람을 앞질러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런데 내 뒤에 오던 사람이 그 사람의 짐을 들어주었다. 아뿔사! 내가 그분을 도울 기회를 놓친 것이다.

깨어 있음은 이렇게 순간적이다. 깨어 있음은 주님을 향한 영적인 사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깨어 있음을 고통에 민감해진 상태로 이해한다. 물론 내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다. 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고통받는 이웃과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고립된 삶이 가장 힘든 삶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에도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고립이 고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하나님 나라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인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이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때이다. 다른 사람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인정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이것이 환대의 이유이며 결과이다.

먹을 것과 잘 곳과 입을 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고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고립된 섬으로 사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나눌 사람이 없어 힘든 것은 내가 특별히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니다. 고립이야말로 인간성 상실의 가장 명확한 증거이자 인간이 감내하기 가장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게 하셔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오래전 읽은 책이 생각난다. 한 부부가 아기를 잉태했다. 그런데 태아의 뇌가 머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의사는 중절 수술을 권했지만, 부부는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죽었다. 부부는 아기가 죽는 순간까지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아기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아이에게 루카스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장례를 치르면서 루카스의 아빠는 자신을 아버지로 만들어준 아기에게 고맙다는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루카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죽었다. 엄청난 불행도 이처럼 감사가 될 수 있다.

새삼 이웃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가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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