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훈 장로(한국)

왠지 불안하다. 이 불안은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고 그만큼 내 삶에 허점이 많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고 몸에 큰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늙어짐을 느끼는 나이, 그 나이에 이르렀으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스스로 풀었다. 일종의 자기 합리화다. 생각해보니 이 불안은 여유가 없는 막힌 여백인 듯하여 더욱 그렇게 여겨지는 것 같다. 내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내겐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곧 평안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면 기도를 한다. 시편 23편을 잠잠히 암송하고 하루 가운데 감사했던 일을 더듬어 감사기도를 드린다. 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설령 내일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해도 내 마지막 의식(意識)과 말은 신앙고백이 될 터이니, 지극한 평안의 기도인 셈이다. 그렇게 맞이하는 아침은 늘 새날이요 기적이다. 아침에 눈을 떴어도 몸은 무겁기 마련이다. 정신이 몽롱할지라도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 주님, 새날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습관적이지만 경건한 기도를 한다.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새날, 내 삶의 진정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샬롬이란 성경적인 인사말에 익숙하지 않다. 아내는 아침마다 유튜브에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꼭 샬롬!’ 하고 인사한다. 목소리 또한 부드럽고 낭랑하여 여간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고작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짧은 설교지만 메시지는 또렷하고 따뜻하여 영적인 양식과 에너지를 얻는다고 볼 수 있다.

샬롬(shalom)은 유대인의 보편적인 인사말이다. 평안(平安) 혹은 평화(平和)라는 뜻을 품고 있다. 어쩌면 이 인사법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사일 수 있다. 유대인들이 3,500년 동안 지켜온 인사라고 하니까 말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샬롬! - 평안하뇨?’였다. 샬롬이란 말에는 완전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평안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인사는 안녕하십니까?’ 혹은 식사하셨습니까?’이. 달리 말하면 편안(便安)과 가까운 말이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外侵) 가운데 생존이 달린 극한 시련의 역사였다. 게다가 굶주림이 보편화되었었다. 어쩌면 안녕하십니까?’는 당연한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식사하셨습니까?’도 그 유래가 타당하게 여겨진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배경이 인사말에 함축된 듯하여 애닯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는 일상은 매우 소중하다.

나는 아침에 만나는 직원들에게 먼저 굿모닝을 외친다. 아니 좋은 아침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사실 굿모닝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섬나라인 영국은 안개가 자주 끼고 워낙 날씨가 변덕스러워 맑은 날 보기가 쉽지 않았기에 그 소망을 굿모닝이라는 아침 인사에 담았다고 한다. 나는 굿(good)’이라는 영어도 좋고 우리 말 좋다는 더 좋다. 굿모닝이란 인사말에서 창조주의 은총까지 느껴진다고나 할까.

유대인들은 자녀의 무덤 앞에서도 이 샬롬을 읊조린다고 한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 앞에 겸손히 살아가는 것이 사람됨의 본분이다. 나는 이 편안과 평안의 어원적인 의미를 굳이 더 이상 캐고 싶지 않다. 그저 상식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서다. 모름지기 편안을 위해 평안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문과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가 먼저 평안하뇨?’ 인사했다. 생각할수록 부활의 권능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고 구원 사역을 이룬 메시아의 완전한 인사였다. 그 인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내게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평안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평안함 속에 빛이신 그분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 평안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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