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순(캘리포니아)

모처럼 혼자만의 점심냉장고 안에 조금씩 남아 있던 것들멸치볶음콩나물을 꺼냈다전자레인지로 데운 밥을 큰 대접에 담고, 그 위에 잘게 썬 김치와 햄까지 덮었다그리고 참기름과 고추장김가루를 더해 마구 비볐다.
 

색깔과 냄새가 그럴 듯했다아침 햇님 같은 계란 후라이 하나 올렸다내가 생각했던 아무렇게나 때우려던 점심이 아님에 놀랐다귀한 사람을 대접해도 괜찮을 향과 격을 갖춘 비빔밥이 되었다두 손으로 받쳐 들고 우아하게 식탁에 앉았다.
 

마구 비빈 밥 속에 담겨 있는 품위는 전혀 의도되지 않은 것이었다하나님이 주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햇살 같은 희망으로 이끄심에 크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정식 비빔밥이 무안할 만큼 기막힌 맛이었다혼자 먹기 아까운 그 맛더 귀한 것을 끌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머릿속에 피어난 다정한 사람두서없이 마음으로 말을 걸며 밥을 먹었다잘 있지거기도 가을 왔지하늘도 높아졌지? 단풍길 여전하고자전거로 신나게 달린다는 그 길 환상이지가을 바람은 아직도 상쾌하고아픈 다리는 좀 어때백신 맞은 후유증은손자의 재롱은 오늘도 여전하고

난 혼자 점심을 먹고 있어해가 많이 짧아졌어가을이 오면 풍성함과 서늘함이 반가워서 설레기까지 했는데 이번엔 참 스산하게 느껴져처음 맞는 계절같이 낯설고 서글퍼내가 다다른 삶의 계절로 느껴져 그런가봐이럴 때 달려가 얼굴 맞대고 앉았으면 참 좋겠다그럴 수 없는 이 세월이 원망스러워.


엊그제는 이곳에서 드물게 이틀이나 비가 왔어온 밤 동안 자장가처럼 내 잠을 다독이려고 멋진 연주를 해준 반가운 비였어.
 

그러나 오랜만에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들은 빗길을 엉금거리며 달렸지꼭 필요한 일이 없으면 아예 밖을 나가지 않았다는 친구도 있어나도 무서웠어크고 작은 사고 소식도 많이 들렸어그곳에서는 눈길 운전이 어렵겠지만비가 어쩌다가 내리는 캘리포니아에선 맑은 날 운전에만 익숙해져서 그래.
 

집앞 공원을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도 물이 아주 풍성해오리 가족은 신이 났어떼를 지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어오랜만에 온 가족이 깊은 물 위의 수영을 즐기고 있었나 봐!


공원의 다람쥐들은 바닥에 널려 있는 도토리를 주워다 여기저기 숨기느라 분주해다람쥐들의 눈치를 보며 나도 도토리 한 바구니를 주워왔어내일의 점심은 아마도 도토리 수제비가 될 거야.


산불이 다 꺼져서 공기도 참 좋아조금 전 산책할 때 비행기가 꽁지에서 하얀 물감을 풀어 긴 선을 그렸어깊고 맑은 파란 하늘에 망설임 없이 한 줄 내리긋는 직선의 멋멈춰 서서 한참을 올려봤지.


지금 창문 밖 뒤뜰의 장미가 영원한 짝사랑가을 하늘을 향해 목을 빼고 있어아무도 흉내낼 수 없이 요염한 빨강색 봉오리를 높이 쳐들고 바람의 도움으로 살랑살랑 교태까지 부리며 도도한 하늘을 유혹하고 있네.

  

비빈 밥 안에 담긴 맛과 멋이 하도 귀해서 말을 거는 거야. 말하다 보니 우리의 계절늦가을의 스산함도 사라져 버리고 멋지게 느껴지네가을의 벅찬 가슴이 살아났어늙음 탓이 아니라 그리움 탓이었던가봐.


이 비빔밥의 멋과 맛외로움 덜어 주시려고 늘 함께하신 주님의 뜻이 분명해자기에게 말 걸게 하신 분도 우리의 주님이시잖아.


마음이 함께 있는혼자 먹는 풍성한 식탁늦가을의 설렘도 되살려준 점심오가기조차 조심스러운 시기팬데믹을 위해 주님이 펼쳐 주신 특별한 식탁.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