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딸아이가 손자를 데려와 우리 집에 며칠씩 머물다 갑니다.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엊저녁에는 작은 아이가 회를 사와 파티가 열렸습니다. 아무리 회가 맛있어도 손자 녀석의 반응이 최우선입니다. 녀석이 깔깔 웃거나 갑자기 울면 모든 대화가 중단됩니다. 녀석은 큰딸이 준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식빵 맛집이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그 빵집에 가서 식빵을 샀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빵을 사고 나오는데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기분 탓인지 식빵도 기대 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식빵을 사고 받은 영수증을 우연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일만삼천 원인데 영수증에는 일천삼백 원이 찍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친절하지도 않고 빵 맛도 없는데 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나머지 돈을 주려고 빵집에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빵집이 쉬는 날이었습니다. 며칠 지난 후 다시 빵집에 갔습니다. 문을 닫았습니다. 빵이 다 팔린 모양입니다. 세 번째 만에 나머지 빵값을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빵집 주인은 식빵 하나를 집어주면서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망설이는 눈치였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나오려는데 단팥빵이라도 하나 가져 가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빵집 주인에게 잘못 계산한 금액을 돌려주기 위해 세 번째 방문한 거니까 이 정도는 받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단팥빵 한 개를 받았습니다.

딸들이 잘 되었다고, 그렇게 불친절한 가게에 다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지만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빵집 주인이 식빵 하나를 들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순간 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가난해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꼰대는 자신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젊은 커플들이 음식을 공짜로 먹고 도망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인해 장사가 힘든 곳에 가서 맘껏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치는 일은 장사하는 분들을 주저앉게 만듭니다.

도망친 사람들이 커플이었다는 사실에 더 절망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아이를 정직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걱정도 팔자라는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둘째 아이에게 남자를 사귈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힘'이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합니다. 그런 후에 인생 목표가 있는가를 보고 그 목표가 공동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를 헤아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해줍니다. 길바닥에 휴지를 버리거나 침을 뱉는 사람, 운전하면 난폭해지는 사람, 식당 종업원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 등입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신실한 종은 적은 일에 신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적은 일입니다. 그 적은 일에 신실한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의 본질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아무 하는 일이 없습니다. 참된 교회의 꿈을 꾸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시간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수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일에서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신실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집니다.

며칠 전 시장에 가서 닭강정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주문한 것과 다른 양념으로 닭강정을 만들었습니다. 내게 어떻게 하냐고 물었습니다. 무심코 가장 많이 나가는 양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하고 더 맛있게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콜라를 하나 주면서 미안하니까 이거라도 가져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사양했지만 기어이 콜라도 담아주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미 기억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주인과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 일이 기쁜 것은 그 일을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렌스 수사님처럼 24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고 주님이 생각나는 경우는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과 함께 미소를 나눌 때 행복해집니다. 주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시간이 예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저는 작아지는 순간마다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모욕하시려면 꼰대 같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꼰대란 자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신실해지고 작아지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가난은 신실해지는 일과 작아지는 일에서 가장 효율적인 도구입니다. 이런 것이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말씀하신 하향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주님과 분리된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걸 영적이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실함이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에도 신실할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커피 농사꾼도 생각해야 하고 커피 공장 노동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 먹고 도망가는 커플들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세상 모든 사람은 제게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할 일이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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