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PMI 바울사역원 대표)

11월하고도 중순, 10월 마지막 날에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을 논하며 남은 두달을 의미있게 보내자고 지인들과 다짐했다. 하지만 지난 보름여의 시간 속에서 어떤 의미와 어떤 열매가 있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이러다 올해도 훌쩍 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차가운 공기에서 느낄 수 있고 나무와 숲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둘씩 떨어지던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자 우수수 날아 내려 앉고, 숨어 있던 가지들은 끝에서부터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우기에 접어들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길가는 낙엽들로 수북하고 하늘을 가리던 거목조차 이젠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이다. 나무가 벗어버린 옷들이 집 마당마다 가득하다. 널브러진 낙엽들을 치우느라 매일매일 쓸어모으고 특별 수거 차량이 그것들을 실어나르지만 앞으로도 한두 주는 그 일을 계속할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무가 잎을 버린 것일까? 잎이 나무를 떠난 것일까? 그렇다면 왜? 가을마다 나무들이 옷을 벗는 것, 나무와 잎이 분리되는 것은 활엽수가 겪어야만 하는 자연의 법칙이자 가을의 처세술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겨울이 오기 때문이다. 겨울은 멈춤과 혹독한 시련을 상징한다. 어떤 경우는 심판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겨울은 나무에게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요구한다.

그 혹독한 계절 앞에서 나무는 자신의 몸에 매달려 있던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 한다. 수십 년의 수명을 갖고 태어난 나무에 반해 나뭇잎은 단지 1년이라는 수명을 가졌을 뿐이기 때문이며, 겨울이 온다는 것은 그 수명이 다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몸이 되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것을 어길 수 있는 활엽수는 세상에 없다. 

퀴블로 로스라는 사람은 인간들이 죽음에 이르는 단계를 5개로 구분지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인정의 단계이다. 개인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이 과정이 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무는 계절의 법칙에 잘 순응하는 존재이다. 겨울이 온다고 도망가지 않는다. 때가 되면 순순히 이별을 한다.

그래서 나무의 세상은 조용하다. 인간들이 본받아야할 점이 아닐까? 놀라운 것은 이별을 받아들이고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나무는 생명의 연장이라는 선물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없이 쓸쓸하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이 과정을 감수한 나무의 뿌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음해 봄이 되면 지상에서 내려오는 따스한 햇살의 기운을 받아 부활한다. 생기를 뽑아올리며 새순을 돋게 만든다. 지난해보다 더 많은 가지와 잎과 열매들을 생산해 낸다. 

나무는 다가오는 겨울을 부정하지도 않고 겨울과 수명 연장을 거래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며 겨울의 힘을 받아들인다. 봄은 그런 나무에 대해 너무 잔인했던 겨울이 표현하는 미안함 아닐까? 따스함은 자신의 법에 순응해 준 생물들에 대한 선물일 것이다. 

인생에도 겨울이 있다. 역사에도 겨울이 있다. 그리고 그 겨울은 다가오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코앞에, 어떤 공동체에는 저만치 와 있다. 인간은 나무처럼 순리에 순응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운명을 거부하려 하고 때로는 씨름 끝에 이겨내기도 한다. 그래서 시끄럽다. 자연 생물과 비교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인간도 겨울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항복이 아니라 지혜이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인 가을에 나무가 보여 주는 처세술도 배워야 한다. 떠나 보내야 할 것들을 떠나 보내고 벌거벗겨지는 것도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 쓸쓸해 보이는 것도, 죽은 것처럼 취급당하는 것도 비참해 할 필요가 없다. 피하려고만 하지 않기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하소연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가오는 겨울 앞에 묵묵히 서 있으면 된다. 

예수께서 환란의 날에 끝까지 굳게 서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람이 달라고 하면 잡았던 것들을 놓아 주면 된다. 마치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겨울 속으로 들어가 죽은 듯 있다보면 언젠가 올 것이다. 겨울이 남겨 준 선물인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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