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 (14)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누가복음 10:33-34).

연말과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이웃에 대해 더욱 생각해 보게 된다. 몇 달 전 뉴욕 맨해튼에서 65세 아시아계 여성이 무차별 폭행을 당하였지만, 주변에 이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통계 기사를 보면 2020년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 사건이 3,800건이나 보고되었고, 2019~2020년 전체 혐오 범죄가 7%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는 오히려 150% 증가했다. 그리고 대부분 여성이 범죄 대상이었다. 이 기사 내용을 읽고 강도가 되려는 사람은 많아지는 것 같은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이를 성 어거스틴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을 상징하는 구약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당한 것과 같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었던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환자를 옮긴 주막은 교회로 비유 해석하였다. 이처럼 비유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통한 해석이 중요하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한다. 시험한다는 단어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존(ἐκπειράζων)”으로 사단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성경을 의도적으로 잘못 인용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눅 4:12)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이다. 율법 교사는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가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아셨기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라고 반문하셨다. 예수님이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보신 것은 그 읽은 내용을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내용대로 살고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이에 율법 교사는 신명기 말씀의 ‘셰마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라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고 하시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고 묻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을 자기의 기준으로 사랑하며 살았다고 자부했기 떄문일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사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눅 10:33)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후대에 사람들이 붙여준 명칭이다. 이 비유의 내용은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나 당시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 교사에게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물으신다. 이 질문에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고, 예수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라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핵심은 ‘누가 내 이웃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던지는 질문은 ‘내가 이웃이 될 것인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 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장면에서 비슷한 개념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이 밖에 있다는 어떤 사람의 말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라고 말씀하시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말씀하시어 혈육에 의한 가족의 의미를 뛰어넘어 하나님 자녀로서의 가족의 의미를 정의하셨다.

예수님께 물었던 율법 교사에게는 같은 유대인으로 같은 법과 규례를 따르는 공동체만이 이웃의 범주 안에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이방인으로 우연히 만난 자가 그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동시에 예수님은 그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한다. 그 이웃이 사마리아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형제요 어머니이다.

1973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누가복음 10장의 내용을 발췌하도록 숙제를 내주고 강의실 오는 길에 아픈 자들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이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아픈 사람을 못 본 체 그냥 지나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앞에 아픈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그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할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현재 눈에 보이는 바로 옆 사람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없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8년 4월 3일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선포한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말씀을 청중에게 전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셰마 이스라엘’을 매일 암송하며 율법의 최고 계명으로 인정하지만, 정작 그들은 위기에 처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그냥 지나쳤다. 그 이유는 ‘만일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사람을 돕는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 ‘시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해진다’는 생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강도 만난 자가 자칫 죽어 있거나 죽게 되면 자신이 부정해져서 제사장 직분을 하지 못하게 되는 피해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만일 내가 가던 길을 그냥 가고 이 사람을 지나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라고 자신이 받을 피해보다 이웃이 받게 될 피해를 생각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웃을 만날 때, 이웃이 나에게 미칠 영향을 계산하지 않고 내가 그 이웃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편견 없이 이웃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푸는 참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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