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이야기 - 산상수훈 (8)

1. 칡 넝쿨과 등나무의 갈등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놀던 동네 뒷 산에서 칡넝쿨을 발견하면 그 쓰고 달고 오묘한 맛에 중독이 되어 계속 씹고 씹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칡넝쿨을 보면 항상 오른쪽으로 나무를 감아 올라갑니다. 칡넝쿨과 비슷한데 정 반대 방향으로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등나무가 있습니다. 등나무는 나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칡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 식물로 발한, 해열에 좋은 한약재로 사용되고, 등나무는 공예품으로 사용되고 등나무의 꽃은 꿀이 많아서 양봉 농가에 유용한 나무입니다. 

이렇게 좋은 칡넝쿨과 등나무가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나무에 칡넝쿨과 등나무가 만나면 칡넝쿨은 나무를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나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서 서로 갈등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등이라는 말은 칡넝쿨의 갈과 등나무의 등이 만난 합성어입니다. 한 나무에 갈등이 생기면 서로 뒤엉키게 되고 결국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오른쪽으로 올라가려는 칡넝쿨과 왼쪽으로 올라가려는 등나무의 갈등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의 일곱 번째 복은 화평하게 하는 자 (peacemaker)의 역할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입니다.“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화평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2.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식

예수님의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던 제자 가운데 그 말씀을 받기 어려운 가나나인 시몬이 있었습니다. 아람어 가나나인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심당원이며, 헬라어인 셀롯도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의 목표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억압과 핍박에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해서 이 땅에 유대 민족의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정치적 행동주의입니다. 

시몬은 화평보다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며 오직 열심당원들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열심당원 시몬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평을 회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 언약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약속의 말씀입니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이 땅에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은혜 언약의 약속대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인간과 인간이 서로 원수가 되어 깨어진 화평의 회복을 위하여 화평케 하는 자로 일하셨습니다. 

칼이 아니라 거짓의 말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방식은 단 한 가지, 곧 십자가입니다. 마음의 악한 죄와 악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던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에서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인간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죄악을 씻어 이제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3. 인간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며, 수평으로는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며, 다음은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는 방법도 십자가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루는 방법도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율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언약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언약의 자녀가 아닙니다. 율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서로 원수 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평케 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시고, 사람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셨는데, 아직 이 땅에 화평이 없고 서로 갈등하는 이유는 우리도 모르게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재물로, 명예로, 권위로 갈등을 만드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같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죄 없다 인정해 주십니다. 지금도 십자가 정신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깊이 경험한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며, 동시에 어두운 이 세상에서 화평의 사람으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4. 주여 나를 화평의 도구로 써 주소서!

화평케 하는 일로 쓰임 받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탄과 사탄의 아들들은 화평에 관심 없습니다. 화평을 깨뜨리고 분열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은 갈등을 줄이고 화평을 만드는 화평의 사람으로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은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 땅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화평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의 따사로운 햇볕을 선한 사람에게도 비추어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추어 주십니다. 하늘의 단비는 의로운 사람, 불의한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광야 같은 지역에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삶이 화평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삶이라면, 우리 지역에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우리의 가족, 우리 교회의 형제, 자매를 넘어서 우리 지역에 산 위의 동네 같은 빛을 비추며 화평케 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삶을 기대하십니다.

* 편집자 주: 김민순 목사는 서울대, 총신대 M. Div., 합신대, 칼빈세미너리 역사신학 Th. M. 및 Ph. D.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뉴멕시코 주 알버커키 갈릴리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