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숙(일리노이)

빈 둥지(Empty Nest)가 실감나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가 오늘 새삼 더 텅 빈 느낌이다. 매년 새벽같이 일어나 굽던 터키도 먹을 식구들이 없어 굽지 않기로 했다. 세 아들 각자가 건강한 독립군으로서 세상의 한 자리가 되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중이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즐기고 큰아들 내외와의 브런치 약속을 위해 단장하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A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날씨만큼이나 우울한 목소리가 불안하다. 브런치를 하고 돌아와 A와 오랜만에 긴 얘기를 나눴다.

“언니! 사는 게 뭐야? 왜 이렇게 힘이 들어?”

나도 예전에 야곱처럼 남의 뒤꿈치만 붙잡고 늘어지며 살았을 때에는 같은 질문을 하늘에 대고 했다.

충분히 A의 심정이 헤아려지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돌보던 조카의 독립으로 혼자가 되면서 잠시 물러서 있던 우울증이 다시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이를 유산한 이후 그 어떤 노력에도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A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남들이 보기엔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갖고 싶은 아이가 없는 게 A를 늘 우울하게 했다. 조카에게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그녀도 조카의 독립으로  나와 같이 빈 둥지를 실감하는 중인가보았다. 세 아이를 키우며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함에 나름 빈 둥지를 즐기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A는 다시 우울해진 모양이다.  

우린 오래 전에 나눴던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 이야기를 다시 나눴다.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가 당분간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점점 잎이 마르고 시들며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나는 모습이 마치 창조주를 떠나 자기 힘으로 너무나도 열심히 사는 우리네 모습을 닮았다며 쓸쓸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울한 마음을 믿음으로 달래며 어쨌든 우울증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A에게 조카를 돌보는 일은 또 하나의 치료제였는데, 이제 조카마저 떠난 자리가 더욱 휑한 모양이다. A의 우울한 이야기를 듣다가 난 좀 엉뚱한 말을 했다. 

“우리가 이 땅에 오리지널(original)로 왔는데 카피(copy)로 사는 게 맞나? 남이 가졌다고 왜 꼭 나도 가져야 되는 건데? 내가 세상에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내가 없지 않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구?! 이 땅에 A라는 오리지널이 하나밖에 없는데 자꾸 남을 카피하면 토기장이는 어찌해야 되겠냐?”

비유가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고 요 몇 주간 묵상해 오던 말들을 그냥 주절거렸다. 나는 주절거려도 성령의 지혜와 은혜를 믿기에...  무슨 말이 먹혔는지 A의 우울한 마음이 조금 수습되는 듯했다.

“언니! 내 삶이 실패한 건 아니지?”

“실패라니?! 우리가 부활을 믿고 있잖아. 부활 신앙이란 것이 뜬구름 잡는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말이야. 지금 나는 실패한 것 같고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승리를 완성하실 것을 믿는 거 아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몸을 당신의 부활의 몸으로 쓰시겠다고 할 때 A가 기꺼이 내어 드렸잖아. 실패 여부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그분의 책임인 거지. 그분이 우리 몸을 빌려 쓰시는 이유도 결국은 우리 몸으로 행하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 사랑에 이르도록 시스템을 만드셨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몸의 부활에까지 이르도록...”

A가 말했다.
"부활 만큼 큰 추수가 없네”

난 기도한다. A가 부활의 주님을 힘입어 우울증을 극복하고 더욱 풍성한 부활의 새 시대를 열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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