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훈 장로(민영 소망교정시설 교도관)

내 집으로 이사했다. 내 집을 고대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언덕배기 동산에 내 집이 세워지고 점점 층수가 올라가던 새 아파트를 바라보면 뿌듯한 기분이 들곤 하였다. 집은 그렇게 내 마음에도 지어졌다. 참 애틋한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흥얼거리던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랫말이다. 곡조도 애잔하여 쉬이 배웠고 어렵지 않게 불렀다. 이 노래는 영국의 작곡가 헨리 비숍(Henry Rowley Bishop 1786~1855)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페라 작곡가인 비숍은 약관 27세에 영국 로열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될 정도로 출중한 실력자였다. 이 노래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 북부군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열린 음악회 가운데 이 노래가 불려지자 강 건너편에 있던 남부군들도 따라 부르며 잠잠히 가정의 소중함이 일깨워졌을 뿐만 아니라 같은 조국인 나라 사랑의 분위기도 조성되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희생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 1791~1852)이다. 그는 정작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을 떠나 방랑 생활을 하다가 알제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가 돌아오던 날, 미국의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전부 나올 정도로 미국인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친 노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도 같은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야말로 지상의 천국이다.

집이 있어야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돌아보니 내게도 집 장만은 큰 꿈이었다. 결혼을 하고 첫애가 태어났다. 셋집도 신혼의 단꿈을 펼치기엔 넉넉하였지만 내 집이 아니니 주인의 눈치를 보며 때마다 집을 비워 줘야 할 처지는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가 정말 은혜롭게 언덕배기 동산에 낡은 집을 장만했다. 허술한 그 집이 다시 새 아파트로 탈바꿈하기까지 과정은 힘들었지만 새 집에 대한 열망으로 넉넉히 기다릴 수 있었다. 그 집에서 십 년 정도 살았다. 그러다가 직장 사정으로 셋집으로 내놓았다가 십 년 만에 다시 들어갔으니 남다른 감회가 몰려왔다. 이 집이 좋은 것은 무엇보다 아침마다 창가에 붉은 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집을 위하여 해가 뜨는 것 같은 남다른 은총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시나브로 가슴까지 따뜻해지곤 하였다.

새 집에 들어갔을 때의 에피소드가 짠하다. 두 아들에게 자기 방을 하나씩 주고 책상과 침대도 사주었다. 녀석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잠을 자지 않길래 물었다. “, 여태 잠을 안 자니?” 녀석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빠,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와.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녀석은 장차 어른이 되면 마을버스 기사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마을버스가 생겨나던 그때, 운행 중인 동료 기사를 만나면 서로 경례를 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하였다. 나는 녀석의 소박한 꿈을 말없이 지지해 주었다. 또 다른 추억은 더 어렸을 때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제 형은 빨리 먹고 말았는데 녀석은 천천히 핥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빨리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녀석은 지금 결혼하여 어엿한 가장으로 굴지의 외국계 회사에 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곧 아빠가 된다.

집은 소중하다. 생활의 안식처이다. 이왕이면 그 집에서 날마다 사랑꽃이 만발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이웃과 더불어 정답게 살아가는 그런 집을 가꾸고 싶다. 그러라고 날마다 아침 해가 뜨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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