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아버지학교 홈페이지
사진 출처 -아버지학교 홈페이지

최기훈 장로(민영 소망교정시설 교도관)

지난 금요일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소망공동체 제17기 두란노아버지학교가 끝났다.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은혜의 잔치였다. 사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모든 교화 프로그램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점차 완화되어 신입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심스럽게 시작한 프로그램이 이번 아버지학교였다. 나 역시 진행자로 나섰지만 여러모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잘 훈련된 스태프도 없었다. 개설팀의 김병용 계장이 모든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이미 준비된 수용자 형제들의 자발적인 섬김이 있어서 가능했다. 조장팀은 물론 노래팀, 관리팀, 영상팀까지 착착 손발이 맞았다. 노래팀에는 김연진 씨가 탁월한 리더십으로 잘 이끌어 주었다. 또 두란노아버지학교 본부에서는 강의 영상이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주저하지 않고 지원해 주었다. 모자람을 채워 주고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나는 알량한 내 학력 가운데 두란노아버지학교를 넣었다. 때때로 내 글을 올려 페친들과 정담을 나누는 페이스북 정보란에 말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아버지학교가 나에게 까마득한 16년 전 그해 늦은 봄날에 찾아왔다. 교육 시간도 주말마다 5주 동안 열렸으니 고작 스무 시간 남짓이었다. 정규 교육의 기회가 끝나고 바투 오십에 다다른 나이, 나는 아버지학교를 값지게 체험했다. 의미 있고 질 높은 재미가 가득했다. 교육 내내 뜨거운 감동의 도가니여서 아버지학교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번에는 아버지학교 진행자로서의 섬김이었다. 지역에서 진행자로 네 번이나 섬겼지만 그것도 12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보람과 감동은 예전에 비교할 바 아니었다. 진행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오래된 것들이었다. 할 수 없이 함께 사역했던 분에게 최근 자료를 요청했다. 사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2년째 계속되고 있으니 교도소마다 교화 프로그램이 멈춘 상태였다.

돌아보니 2005년 봄 나는 아버지학교를 수료하자마자 아버지학교 사역자로 나섰다. 내가 속한 서울 서남지부는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영등포, 구로, 광명을 아우르는 지역에서 풋풋한 아버지들과 함께하는 기쁨이 컸다. 1995, 우리나라에 아이엠에프가 닥치고 어려운 경제 상황 가운데 무너지는 가정들이 속출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시작한 가정 회복 프로그램이 아버지학교 운동으로 확산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불길은 한국을 벗어나 74개국 298개 도시에서 아버지학교를 열게 하였다. 20208월 기준, 408,473명의 수료자를 배출한 역사였다. 마침내 2000년대 초반 시작된 교도소 아버지학교도 역동적인 사역으로 자리 잡았다.

201012, 우리나라에 최초로 민영 소망교도소가 문을 열었다. 복음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소망교도소에 아버지학교는 지체들의 질서와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고 변화와 감동이라는 실천 윤리가 자리잡도록 크게 이바지했다. 이번 기수가 제17기였으니 그동안 기울인 기도와 정성이 헛되지 않았다. 확실히 아버지학교는 초기부터 복음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에 성령 운동, 실천 운동, 평신도 운동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회복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 자신도 그동안 사역의 발걸음이 매우 행복했다. 무엇보다 나는 교도관이기에 교도소 아버지학교의 실질적인 사역자가 되고 싶었다. 그동안 영등포교도소, 안양교도소, 공주교도소, 원주교도소 등을 찾아가 섬기는 보람은 영적인 기쁨이었다.

안양교도소에서 처음 조장으로 사역할 때를 잊지 못한다. 얼마나 추웠던지, 그럼에도 외투도 걸치지 못하고 아버지학교 교복인 얼룩무늬 티셔츠 속에 내복을 두 개나 껴입지 않을 수 없었다. 갇힌 형제들을 향한 아버지학교 스태프들의 정성은 뜨거운 사랑, 그 자체였다. 세족식을 하며 눈물이 났다. 그때 만났던 한 수용자 형제는 지금까지 교제를 지속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참 평범한 아버지들이어서 더욱 살갑다. 택시 운전, 세탁소, 치과의사, 공무원 등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생업을 뒤로 하고 주말에 오로지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버지학교는 이 시대에 입이 아닌 몸으로 전도하는 현장 사역이라는 생각이다.

여기 당시 내가 아버지학교 첫 주에 체험했던 감동의 순간을 기록했던 일기를 소개한다.

2005429
기대가 크다. 내일부터 나는 아버지학교에 간다. 내심 나만 한 아버지가 있으려고? 자만에 빠진 나였다. 그래서 이번에 아버지학교를 지원하며 새롭게 다짐하는 것은 이제 라는 아버지의 부실한 성()을 허물고 아주 튼실하고 근사한 아버지의 성()을 다시 쌓을 참이다.

2005430두란노아버지학교 서남 51주차
지난번에 자살을 기도했던 수용자 형제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영등포구치소기독선교회 직원수용자연합예배에서였다. 키도 크고 잘 생겼다. 그는 조심스럽게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을 잡고 정식으로 내 소개를 했다. “이제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형제님!” 그의 얼굴에 평안함이 역력했다.

그 예배를 마치고 나는 서둘렀다. 오후 5, 두란노아버지학교 첫 주차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고척교회 교육관 2층 계단을 오르며 묘한 감동이 스며들었다. 알고 보니 노래하는 스태프들의 우렁찬 하모니가 가슴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허깅(hugging 포옹)을 배웠다. 사실 나는 허깅이라는 말에 괜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꿈꾸고 좋아하는 시어(詩語) 가운데 포옹(抱擁)이라는 말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와 더 나아가 간절한 포옹을 내 신앙적 토대에 열망하던 터다. 그럼에도 나는 이 낯선 외국어인 허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뜨거웠다. 땀에 젖은 낯선 지아비의 가슴들이 그렇게 따뜻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두란노아버지학교에서 첫날에 배운 것은 바로 이 허깅이었다. 아마도 족히 수십 번 낯선 아비들의 가슴을 끌어안은 듯하다. 허깅은 눈을 바라보며 양손을 벌리고 서로 다가가서 가슴을 맞대고 어긋나게 상대의 등을 꼭 껴안아 주는 인사법이다. 더 중요한 것은 껴안은 채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형제님은 좋은 아버지입니다.”라고 인사를 나누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그동안 이 사랑과 격려의 인사법에 문외한이었던 것.

내게 아버지학교는 우연이 아니었다. 10년 전 아버지학교 초창기에 소문을 들었고 기회가 되면 나도 등록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2년 전에도 한 스태프의 적극적인 권유에 핑계와 변명으로 미루다가 급기야 직장선교회장이 되고 나서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선교회원 다섯 명과 함께 등록했다.

아버지학교는 놀라웠다.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이었지만 96명의 지원자에 무려 40여 명의 스태프들이 손과 발을 맞춘 섬김이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아버지학교를 수료한 선배들이었다. 10년 역사의 아버지학교의 위력(?)은 컸다. 아버지학교 지원서는 일종의 서약서였다.

본인은 아버지학교 전 과정에 성실히 참석할 것을 서약합니다.”

인적 사항을 쓰고 우리 가족의 소망을 적어야 하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거실 벽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라고 가훈처럼 써 붙인 표구가 떠올랐다. 아내를 생각하니 늦은 나이에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애쓰는 짠한 얼굴이 떠올랐다. 또 아직 철모르는 새내기 대학생 큰애의 들뜬 표정과 대입을 앞두고 압박감에 시달리는 고등학교 2학년 작은아들의 순박한 눈빛도 스쳤다. 그렇다. 우리 가족의 소망은 가정 자체였다.

무대에선 저음의 구성진 목소리로 대중가요 만남이 울려 퍼졌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였다. 기타와 드럼 반주에 맞추어 신나는 보컬 합창으로 스태프들이 얼룩무늬 감색 티셔츠 유니폼을 입고 그렇게 우리 만남을 벅찬 목소리로 축복해 주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 송이 깊이 가슴에 와닿았다. 한 테이블에 일곱 명씩 마주 앉았는데 낯설지 않았다. 조 이름을 정했다. 열띤 경합 끝에 불가마 조라고. ‘뜨겁게! 뜨겁게! 달구자! !’ 구호도 외쳤다. 불가마는 신실한 아버지를 꿈꾸는 뜨거운 가슴들의 집합체였다. 아버지학교의 당위성을 입증하게 하는 요즘 세대 아버지의 부재 현상을 추적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편집 방영되고, 점차 묵직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거룩한 부담감이었다. 이 구호는 더욱 파장이 컸다.

주님, 제가 아버지입니다

조별 자기 소개를 하는데 억지로(?) 등록한 분이 많았다. 나 역시 결코 자발적이라고 자랑할 순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번 아버지학교를 준비하며,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중보기도팀은 계속해서 아버지학교 지원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도의 불가마 속에서 어설픈 아버지들이 데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몸과 영혼까지.

아버지의 영향력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열강이었다.
- 아버지의 죄가 아버지 한 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 아버지의 의로움이 아버지 한 세대의 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결속’ ‘사랑’ ‘인도’ ‘파송이라는 4대 기능은 나와는 거리가 있는 단어에 불과했다.

나눔 1 :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나눔 2 : “당신은 지금, 아버지로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농사와 술, 중독에 가까웠다. 가난한 농부의 7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 아버지의 짐은 너무 무거웠고 글을 모르시니 그 답답함이 오죽하셨을까? 술이 거나하면 눈물부터 보이시는 내 아버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다. 참, 아버지학교는 맛있는 저녁도 주었다. 얼큰한 육개장! 텁석부리 스태프들이 자꾸 더 주려고 안달이었다. 배도 불렀지만 마음은 더 뿌듯했다.

아버지학교 첫날 소감을 이렇게라도 대략 정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만큼 소중하고 간절했기에. 그나저나 벌써 숙제가 부담되고 있다. 아버지께 편지 쓰기, 아내와 자녀에게 편지 쓰기, 아내와 자녀가 사랑스러운 스무 가지 이유, 축복 기도 하기, 아내와 자녀에게 허깅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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