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게 욕심내다 깨어진 감정들을 지그시 눌러 주는 그런 돌 하나 품고 싶습니다."

최기훈 장로(민영 소망교도소 교도관, 수필가)

모자를 벗었다. 참 무거운 모자였다. 입때껏 모자 쓰는 인생을 살았다. 초등학생 때만 모자를 쓰지 않았지, 중고등학교는 물론 곧바로 입대하여 3년 가까이 군모를 썼다. 그러다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교도관이라는 제복 공무원이 되고 보니 지금까지 모자와 결별하지 못한 꼴이다. 거의 50년 동안 모자를 쓴 셈이다. 교도관이 썼던 80년대 모자가 제일 무거웠다. 금속제 커다란 모표까지 달았으니 오죽할까. 순회 점검 때는 그 모표가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았다. 

격일 근무를 하던 그 시절, 새벽 1시에 일어나 잠이 덜 깬 채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다가 철문에 머리를 부딪치기 일쑤였다. 모표에 이마가 찢겨 피가 났다. 모자를 벗고 근무했으면 하는 바람이 그때부터 컸다. 그런데 요사이 모자를 벗고 근무한다. 40년 소원을 이루었으니 감개무량하다. 현장 근무 직원들의 애로를 귀담아 대단한 정책 결단을 내린 당국의 넉넉한 리더십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고 있다. 모자의 중압감은 모자의 무게뿐만이 아니었다. 내게는 ‘누름’ 당하는 압박이 모자를 쓰는 내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누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름돌! 분명 모자는 누름돌이었다. 내 어릴 적 윗집 할아버지는 왕골을 길게 찢어 돗자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조약돌 추를 달아 돌의 무게로 한 땀 한 땀 조여들게 하였다. 튼실한 돗자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어머니는 장독대에 매끈하면서도 묵직한 몇 개의 돌을 챙겨 놓았다. 장독에 무장아찌나 묵은지를 담글 때 간이 제대로 배도록 돌을 얹는 것이다. 또 두부를 할 때도 두부가 잘 굳도록 누름돌이 필요했다.
 
이제 또 다른 디딤돌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 소(所) 정문에서 보안 청사로 연결된 한 이십여 미터 남짓 짧은 길에는 한 걸음마다 모양 좋은 검은 색 돌을 박아 놓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울이었다. 살짝 얼기라도 하면 자칫 미끄러지는 안전사고가 일어나곤 하였다. 급기야 나이 든 한 직원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병원에 갈 정도로 작지 않은 부상이었다. 이 돌은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디딤돌을 치울 수밖에. 모양보다 안전, 껍데기보다 알맹이를 선택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디딤돌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매우 소중하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아들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를 딛고 아들을 나아가게 만드는 게 아버지의 사명이다.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딛고 꿈을 이루라고 지혜와 열정을 다 쏟는다. 큰 애정의 디딤돌이다. 이런 디딤돌은 오로지 사랑과 헌신의 상징이다. 

모름지기 나는 교도관의 사명이 이 디딤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 건너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나를 딛고 건너가길 바라는 뜻이 디딤돌에 담겨있다. 그런 애틋하고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나를 밟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가시오. 그 길이 꽃길이 되고 부디 ‘살리는 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이렇듯 누름돌과 디딤돌은 참 의미 있는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수필가 최원현 선생은 ‘누름돌’이라는 명수필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옛 어른들은 누름돌 하나씩은 품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텐데 자신을 누르고, 희생과 사랑으로 그 아픈 시절을 견디어 냈으리라 생각됩니다. 요즘 내게 그런 누름돌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쳐 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주제넘게 욕심내다 깨어진 감정들을 지그시 눌러 주는 그런 돌 하나 품고 싶습니다.”

정녕 나도 자신을 자주 돌아보고 거친 마음 씀씀이를 다독여 주는 따뜻하고 때깔 고운 마음의 누름돌을 하나 품고 살아야겠다. 이 돌이 귀찮다고 팽개친다면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고 만다. 걸림돌은 상처를 만들기 십상이다. 디딤돌이 제 노릇을 못하고 본분을 잃으면 분명 걸림돌이다. 단언컨대 드러나지 않는 뿌리 같은 디딤돌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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