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2

“예수셩교젼셔” 국가등록문화재 제669호
“예수셩교젼셔” 국가등록문화재 제669호

첫 우리말 성경은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1870년대 초 우리나라 북쪽의 의주 지방에는 중국을 드나드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응찬이란 사람이 한약재를 배에 가득 싣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배가 파선되어 장사할 물건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습니다. 타국에서 오갈 데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 이응찬을 구해준 사람이 선교사 존 로스 목사였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이응찬을 어학 선생으로 채용했습니다. 

또 다른 상인 서상륜은 인삼 장사차 만주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 목사가 치료해 살아났습니다. 두 선교사는 처남 매부간으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동 강변에서 한문 성경을 전하며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소식을 접하고 그 순교의 피를 헛되게 할 수 없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그들은 한중 국경 무역 지대인 봉황산 고려문에서 많은 조선 사람을 만나면서 조선 백성에게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외국인 선교사가 직접 가서 전할 수 없으니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한민족 복음화의 첩경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이응찬과 서상륜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이응찬과 서상륜의 친구인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등도 불러 한글을 연구하며 성경 번역에 착수했습니다. 이들은 성경번역 사업에 종사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회개하여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1882년 마침내 우리말로 된 최초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른바 쪽복음서가 탄생한 것입니다. 정식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3년 전입니다. 이때부터 서상륜, 백홍준, 이성하 등은 이 쪽복음서를 가지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국내에 반입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성하는 성경 보따리를 객줏집에 맡기고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길을 찾았으나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그만 성경을 모두 불태우고 그 재를 압록강에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스 목사는 “성경 씻은 물 먹은 조선 사람마다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백홍준은 성경을 낱장으로 뜯어 그것으로 노끈을 꼬았습니다. 그는 노끈이 된 성경으로 폐지 뭉치를 묶고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넜습니다. 의주의 집에 도착해 노끈을 풀어 인두질로 편 다음 본디 모양의 성경책으로 엮어서 읽으며 전도하여 반 년 만에 10여 명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서상륜
서상륜

서상륜은 성경을 가장 많이 보급한 권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권서란 성경책을 권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매서인이라고도 했습니다.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의 추천으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정식 권서 임명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와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외교 행랑을 이용해 성경 6천 권을 반입하는 데 성공하자, 서상륜은 성경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전도 사역이었습니다. 

새문안 교회 창립보다 3년 전인 1884년에 시작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교회는 서상륜이 그의 아우 서경조와 함께 설립한 한국 최초의 자생 평신도 교회입니다. 서경조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서경조 목사의 아들 서병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아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1887년, 마침내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완역 출간되었습니다. 

한편 젊은 선비 이수정이 1882년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 방문 중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존 낙스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한민족의 복음화를 염원해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선교 보고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기고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사에서는 그를 조선의 마게도냐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수정은 1883년 한문성경에 한글로 토를 달아 ‘현토 한한 신약성서’란 이름으로 출간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란 이름으로 발간했습니다. 

1885년 한국에 온 첫 공식 목사 선교사(이들보다 1년 먼저 입국한 알렌은 의료 선교사였다.)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두 사람은 오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가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보고 놀라며 기뻐했습니다. 제물포 항에 상륙한 그들의 손에는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의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습니다. 

한민족 선교가 우리말 성경의 번역 반포와 함께 출발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유례없는 한국교회 급성장의 이유를 설명하는 열쇠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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