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훈 장로(민영 소망교정시설 교도관)

눈 속에 빠진 적이 있다. 어린 날이었다. 바다 가까운 고향 충청도 태안반도에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쌓였어도 시오리길 읍에까지 걸어서 학교에 가야만 했다. 그날은 아침에 눈을 뜨니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원체 눈이 많이 내린 터라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더듬더듬 아버지는 넉가래로 길을 뚫었다. 가슴께까지 눈이 쌓였으니 자칫 길을 밟지 못하면 고랑에 빠져 눈 속에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적지 내 가슴을 들뜨게 하는 황홀한 추억이 남아 있다. 강한 겨울 햇살까지 내리비쳐 온통 은빛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었으니 그대로 눈 속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설레는 기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후론 그런 기억이 없으니 여간 소중한 추억이 아니다.

요사이 한 폭의 눈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로등이 켜졌으니 어둑새벽인 듯하다. 부지런한 누군가 눈 덮인 공원을 멀리서 사진에 담았다. 굵은 소나무와 사이사이 느티나무, 곧추 자란 대왕참나무와 길섶에 쥐똥나무 울타리, 은근히 단풍으로도 뽐내던 남천, 군데군데 때를 기다리는 때죽나무 매끈한 가지마다 눈옷을 입고 있었다. 차츰 밝아오는 그윽한 풍경이 아름다웠다. 자세히 보니 그 나무의 이름을 가늠할 수 있었고 그 이름들을 나직이 불러 주었다.

하룻밤 사이
세상을 변화시킨 눈이
내 눈을 다시 뜨게 한다
내 눈의 밝음을
왜 몰랐을까?

하룻밤 사이 펼쳐진 눈꽃 세상이 내 눈을 다시 뜨게 하였다. 그 눈이 내 눈을 밝혀 준 것이다. 이 밝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일었다. 눈꽃 세상을 보며 다시금 내 눈의 어둠을 밝혀야겠다는 마음을 깨달음처럼 되새기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난다. 눈 속에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보라가 드셌던 그해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누군가 굳게 닫힌 고향 집 대문을 두드렸다. 친구가 찾아왔다. 이 밤에 느닷없이 친구가 찾아온 이유가 뭘까?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맞았다. 알고 보니 내 친구는 먼 길 나를 찾아오는 그녀를 대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나 여기까지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사랑채 굴뚝 곁에 서 있다가 불쑥 나타났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눈보라처럼 밀려왔다. 그 밤 그녀는 누이 곁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눈길을 헤치며 만리포(萬里浦)에 갔다. 눈이 바다까지 덮을 기세였고 해변에는 모래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진다홍 겨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붉음에 그녀의 눈빛은 눈처럼 더욱 빛났다. “당신의 고향은 눈이 많다지요?” 그녀의 편지 첫머리에 쓰여 있었다. 눈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나는 늦게서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을 찾아 그녀가 약속도 없이 하필 폭설이 내린 날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칼바람이 불고 눈은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거친 눈보라였다. 눈보라 속에 한참 만리포 해변을 걸었다. 나는 그녀가 품은 지극한 꿈을 말없이 들었다. 이방(異邦)에 나가 복음을 전하리라, 예수님의 지극한 마음을 품은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눈이 많은 나라의 선교사가 될 줄이야.

어느덧 나는 그리움이 커지는 나이를 먹었다. 눈이 흐려진다는 뜻일 게다. 그럴수록 눈보다 더 희게 내 영혼의 밝음을 꿈꾸는 속사람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눈 속에 빛나던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목소리가 그립다. 눈처럼 환하며 눈꽃처럼 향기롭고 눈이 부신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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