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 (17)

베데스다 연못
베데스다 연못

임태집 목사(로고스선교회)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양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성전산 북쪽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향해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아 빗물을 담수했던 곳으로‘자비의 집’이라 불렸다. 그 연못가에 행각 다섯개가 있었고, 그 행각에 많은 환자가 모여 있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3절을 보면 모여 있는 병자들은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등이었다. 그중에는 38년 된 병자도 있었다.

그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때문인데 어떤 사본에는 없는 내용이기에 전설과 같은 내용이다. 각색 병에 걸린 사람들이 혹시 병이 나을까 해서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고자 대기하고 있었다.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으려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고 하신 것을 보면, 38년 된 병자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병중에도 계속 죄를 범한 것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그가 죄인이었음을 강조해 준다. 아픈 햇수를 볼 때 그는 평생에 걸쳐 죄와 질병의 고통 가운데 살아왔다.

38년을 기록한 것은 아마도 이 사람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많은 생을 보냈던 것 같다. 오로지 병이 낫기를 바라고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기회를 기다렸지만, 남보다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해 번번이 실패했을 것이다. 그의 삶을 유추해 보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멀쩡해 보이지만, 죄인 중의 죄인이고 영육 간에 아픔과 고통으로 씨름하고 번번이 남들과의 경쟁에서 실패한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구원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절망과 고통 가운데 건져내실 분도 예수님이시다.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 한 사람에게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지만,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는 누가 봐도 버림받고 가능성 없는 실패자요 능력 없는 자였다. 예수님은 남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오셨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연못에 갈 수 있는 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나마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지만, 예수님은 연못에 먼저 갈 수 없는 자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라고 물으셨다. 이 물음은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기 위함이고,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이다. 그에게 소망과 약속으로 믿음의 반응을 원하셨다. 다른 병자들은 병 낫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다. 백부장도, 혈루증을 가진 여인도, 그리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도 예수님께 병 낫기를 위해 찾아왔다. 그떄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막 5:34)라고 하셨고, 귀신 들린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 38년 된 병자는 육신적으로 가망이 없는 자임과 동시에 영적으로도 그만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물음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7절) 라고 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 ‘원하오니 고쳐 주소서’라고 간구하지 않고, 그저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도와 먼저 물속에 넣어 줄 것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물음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쟁에서 실패자요, 몸도 마음도 전혀 가능성을 볼 수 없는 절망스러운 자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그를 치유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에게 찾아오신다. 절망이 깊은 곳에, 아픔이 깊은 곳에,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자에게 오셔서 물어보신다.“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그리고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하신다. 38년의 고통의 시간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일순간에 끝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라고 그 치유받은 병자에게 말했다.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이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렘 17:21-22). 그러나 그 말씀은 병자가 깔고 앉은 자리를 들고 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해석하고 적용한 율법으로 사람들을 간섭하여 지배하고 정죄하려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위선자”,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마 23:27)이라고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를 드러내고자 안식일에 그 병자를 치유하시고 자기 것을 들고 가라고 하셨을 것이다.

성경은 안식일에 대해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 20:12)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마가복음 2:27-28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다. 또 골로새서 2장 16-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처럼 안식일의 그림자로 인해 실제이신 예수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막 3:1-6), 몸이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시고(눅 13:10-17),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함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죄와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케 하시고 그 사람을 거룩케하시는 안식을 완전케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아감이다.”라고 했다.

안식일은 특별한 날이다. 하지만 모든 날이 사실 특별하다. 이날에 그림자가 아닌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야 한다. 38년 긴 세월의 고통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았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한순간에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기에 끝까지 예수님을 소망하며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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