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2014년 어찌어찌하다 내 책이 하나 나왔다. 제목이 좀 길다. 『행복한 바보새 되어 부르는 노래』이다. 일종의 신앙수필집이다. 수록된 수필 가운데 「바보새」라는 글이 있어 바보새를 책 제목으로 하려 했는데 함석헌 선생의 책 가운데 같은 제목의 책이 있어 제목이 길어졌다. 의도치 않았지만 오히려 더 나은 제목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나는 권정생 선생의 『중달이 아저씨네』를 소재로 삼아 글을 썼다. 중달이 아저씨는 바보였고, 그 동화를 쓴 권정생 선생도 바보였다. 그런데 『행복한 바보새 되어 부르는 노래』를 부르는 나는 아직 덜 바보가 되었다. 

오래 전 공동체 생활을 할 때 그곳의 목사님은 내 아내에게 늘 “최 목사 똘똘해서 힘들지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얼마나 큰 욕인지를 그때는 몰랐다. 맞다. 나는 바보가 되기에는 항상 너무 똘똘하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은혜이다. 글 쓰는 바보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맨바보가 되면 글을 쓰긴 어렵다. 그러니 똘똘한 바보도 있어야 한다. 새삼 주님의 인도하심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 나는 똘똘한 바보이다. 하지만 똘똘한 바보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언젠간 나도 그냥 맨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달이 아저씨네」는 그냥 바보 이야기가 아니라 맨바보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맨바보가 되어야 한다. 어제 요약한 글을 다시 인용한다.

중달이 아저씨는 작은 오두막을 짓고 홀어머니와 함께 작은 밭을 일구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 가정을 이루었다. 마을 사람들이 중달이 아저씨에게 어울릴 만한 여인을 만나게 해준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중달이 아저씨네를 바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궁상맞도록 가난한 처지임에도 대책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중달이 아저씨에게는 밭이 두 뙈기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뙈기를 땅 한 뙈기 없는 진수네에게 주었다. 진수 어머니가 “우리도 조그만 밭 한 뙈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한 것이다. 그 후 그들은 그 일을 행복해 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초겨울 어느 날, 중달이 아저씨네로 거지 아이 한 명이 찾아왔다. 열 살 쯤 되는 그 아이는 바보였다. 모두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아이를 중달이 아저씨네는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그 아이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 중달이 아저씨의 아내는 그 아이를 예쁘다면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렇게 그 아이를 가족으로 맞았다. 그들은 더 행복해졌다. 그런데 그 아이가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 그 아이는 살아났지만 수술비를 위해 남은 밭 한 뙈기를 처분해야 했다. 그들은 살아난 아이를 껴안고 쓰다듬으며 행복해 했다. 

이것이 「중달이 아저씨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중달이 아저씨네'가 수록된 동화집 표지
'중달이 아저씨네'가 수록된 동화집 표지

이 동화를 읽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라진 밭 두 뙈기를 생각할 것이다. 밭 두 뙈기로도 충분히 먹고 살기가 어렵다. 그래도 밭 두 뙈기가 있는 것 하고 없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중달이 아저씨는 그걸 지키지 못하고 다 잃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바보라고 업신여기고 불쌍하게 여겼다. 

나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이 실감난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건설하겠다고 모든 재산을 날려버린 나를 사람들이 중달이 아저씨처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보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공감하게 된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 결코 말씀대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바보도 나처럼 똘똘한 바보가 아니라 맨바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니 중달이 아저씨 이야기는 그냥 설교이다. 중달이 아저씨의 두 뙈기 밭 가운데 사라진 첫 번째 밭 한 뙈기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밭이 두 뙈기밖에 없는데 중달이 아저씨는 "우리도 조그만 밭 한 뙈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진수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선뜻 밭 한 뙈기를 나누어 준 것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그렇게 밭 한 뙈기를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했을 때 중달이 어머니가 반대하지 않고 “그러냐, 그렇다면 하나 나누어 주자꾸나. 우린 두 개가 있으니까”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중달이 아저씨가 아니라 중달이 아저씨네가 모두 미친 것이다. 모두가 바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너무 똘똘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똘똘한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멈칫거리는 것이다. 내가 맨바보가 된다면 지금처럼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나에게 세례를 주었을까. 절대로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반사적으로 행동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다. 맨바보가 되지 않으면 황금률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많이 아는 것은 관건이 아니다. 여하히 맨바보가 될 수 있느냐가 그리스도인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없어진 밭뙈기 이야기에서 생각나는 말씀은 누가복음의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이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죽은 후 거지 나사로는 천국(아브라함의 품)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 무엇이 이들을 갈랐는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간단하다. 부자는 세상에서 잘 살았다. 하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자가 했어야 할 행동을 중달이 아저씨네가 보여 준다. 중달이 아저씨의 아내는 밥을 얻어먹으러 온 바보 아이를 집으로 들이고 아예 식구로 만들었다. 성서 속의 부자도 그랬어야 한다. 중달이 아저씨 아내처럼 거지 나사로를 꼭 입양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사로를 불쌍히 여겨 부스러기를 떨어뜨릴 것이 아니라 붙들고 일으켜 자신의 식탁에서 함께 먹어야했다. 문제는 부자가 중달이 아저씨네 동네 사람들처럼 바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개들도 핥아줄 정도로 불쌍한 나사로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사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이야기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지 나사로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상 밑에 상주하는 나사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주는 것으로 으스대고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가 똘똘한 바보가 할 수 있는 한계이다. 그렇다. 우리는 부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똘똘한 바보까지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중달이 아저씨네 식구들처럼 맨바보가 되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있던 밭 두 뙈기마저 없어졌다. 그러면 그들은 남의 밭에서 일하는 것으로 연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끝이라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중달이 아저씨네 식구는 밭 두 뙈기를 버림으로써 여호와의 불성곽(하늘 나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또 다른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렇다. 모든 성서 이야기는 중달이 아저씨네와 같은 맨바보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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