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양들과 함께 사는 양재철


요셉은 애굽에서 이렇게 말하며 살았다. “내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가 형들이 죽이려고 구덩이에 빠트렸다가, 꺼내서 대상들에게 팔아버림으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자, 요셉은 “주인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종으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바로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 해석대로 이루어져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에도 “내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해석하는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요셉은 왕의 꿈을 해석해 일약 총리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애굽의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을 섬기는 온(태양신을 섬기는 중심 도시 이름)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사위가 되었고, “사브넷바네아”(기근에서 세상을 구한다는 의미의 애굽식 이름이지만,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이름과 결혼은 감옥에 있던 이방인을 총리로 세운 것을 합리화하려는 정략적인 배려인 것도 같다. 

아무튼 요셉은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보면 요셉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남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모든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이고, 차남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격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운명을 앞둔 아버지 야곱이 두 손자를 보고 누구냐고 물을 때에도(창 48:8) “하나님이 애굽에서 제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대답한다. 요셉은 내 아들이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주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언제나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내가” 하면서 산다. 기도할 때에는 “주여, 주여” 하지만, 삶에서나 대인관계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산다. 그것을 “내가”라는 우리의 언어가 증거하고, 우리 안에 있는 염려와 근심이 증거한다.

요셉처럼 말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가” 라는 표현이 언제쯤 없어질까? 단순히 언어적 실수일까? 아니면 깊은 곳에 언제나 내가 나의 주인 되려는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일까? 

오늘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8:24) 라는 바울의 탄식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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