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 이세진 옮김 / 민음사 펴냄(2022.5)

‘2021년 3월 10일. 파리-뉴욕 간 AF006 여객기가 노바스코사 주 남부 상공을 지나던 오후 4시 13분, 푹신한 거대 적란운을 만난다. 올해 최대의 폭풍우이다. 벽이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비행이 아직 십오 분 남았지만 북쪽과 남쪽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아치형으로 펼쳐진 전선은 이미 최고치인 4만5천 피트 상공까지 올라와 있다. 3만9천 피트 고도에서 비행 중인 보잉 787 여객기는 뉴욕을 향해 하강을 시작해야 하므로 구름 전선을 피할 도리가 없다.‘(본문 일부)

’마클과 바프로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처박히느라 얼굴이 납빛이 된 와중에도 조종에 집중하며 폭풍과 사투를 벌인다. (...) 폭풍이 그들 뒤로 멀어진다. 비행기는 완벽하게 잘 날고 있다. 하지만 계기판 전체에 이상이 생겼다. 족히 오 분 동안 계속 하강했는데 계기판에는 해발 3만9천 피트라고 나오고 기상 레이더에도 아무 방해 요소가 없다고 나온다.‘(본문 일부) 

2021년 3월에 파리-뉴욕 여객기가 미국 상공에 나타난 때부터 106일 후!
똑같은 민간 항공기가 똑같은 승객과 승무원을 싣고 거대한 구름벽을 뚫고 나타난다. 복제인간도 아니고 AI도 아니다. 3월에 도착한 탑승자들과 6월에 도착한 탑승들 간의 차이는 오로지 106일 동안의 인생 경험과 기억뿐이다. 

이 장편소설 제목이 3월에 뉴욕에 내렸던 소설가가 프랑스로 돌아가 쓴 소설의 제목과 같다. 『아노말리』는 사전적으로 비정상, 이상, 변태를 의미한다.

미국 정부는 과학자들을 부른다. 각종 가설이 쏟아진다. 종교계의 최고 리더들도 불러 모아 이 이상한 일을 설명한 다음 질문한다. ”이들은 신의 피조물인가?“ 

'『아노말리』는 우리 자신에게, 인류에게 들이미는 거울 같은 소설이다. 아니, 거울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좌우가 반전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분신을 만나는 경험을, 나아가 우리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던져 준다고 할까?'라고 역자는 후기에 썼다.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인 2021년, 미국과 프랑스가 주 무대이다. 1부는 3월에 내린 비행기 탑승자 중 여러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3개월 동안에 벌어지는 일들이 그려진다. 범죄, 질병, 연애, 다양한 직업 등등. 2부에선 정부의 반응과 조처, 3월 탑승자와 6월 탑승자가 만나는 이야기다. 3부는 6월 이후 두 비행기의 탑승자들과 주변 인물들의 선택과 변화를  다양하게 보여 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세 번째 비행기가 나타난다? 그들의 운명은?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는 1957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설, 희곡, 시를 쓰는 작가이자 수학자이며, 기자, 언어학 박사이다. 국제적 실험 문학 집단인 울리포(OuLiPo)의 회원이며, 2019년부터 울리포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20년 여덟 번째 장편소설 『아노말리』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같은 해 메디치상, 르노도상, 데상브르상 후보에 올랐다. 『아노말리』는 프랑스에서만 110만 부 이상 팔렸으으며, 전 세계 45개 국가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귀신과 공존하는 드라마는 유행이 되었고, 평행이론 운운하며 차원을 달리해 똑같은 인물들이 공존하는 드라마도 본 적 있고, 순간이동 실험이 진짜로 존재했다는 방송도 보았고, 기계인간과 복제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다가 대립하다가 몰락하는 최신 장편소설도 읽었지만 이 소설이 가장 충격적이다.

나와 똑같은 내게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표정과 습관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반면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 주는 유일한 사람이 생겨서 좋아“라는 어느 등장인물의 말을 들을 땐 가슴이 뭉클해진다. 픽션의 세계에서는 별의별 상상을 현실로 만들지만,  나와 또 다른 나를  한 명도 아니고, 이백몇십명 곱하기 2를 같은 시공간에 등장시킨 소설은 처음인 것 같다.

감상도 해석도 정말 독자 각각의 몫이 될 것 같다. 책장을 덮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또 다른 나와 만나는 나만의 사소설을 써보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상당한 도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과학과 수학과 종교와 예술에 관한 전반적인 상식이라도 있어야 읽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아 이름 외우는 건 아예 포기했다. 

(본문 일부)

'시뮬레이션된 인간은 자기가 사는 가상 환경에서 이상(異常, anomaly)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시뮬레이션된 의식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점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기술 문명이 갈 수 있는 길은 세 갈래뿐입니다. 그러한 문명은 기술의 성숙에 도달하기 전에 멸망하지요. 공해, 기후온난화, 여섯 번째 대멸종 등등으로 우리가 이미 화려하게 증명하고 있잖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시뮬레이션이든 진짜든 우리는 멸종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 있습니까?“
”딥이 없는데 문제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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