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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

임다니엘 목사(크리스찬저널 편집부장)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는 약간의 논쟁거리가 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와 무리들을 자기 집에 초대한 마르다가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손님을 집에 초대해서 대접하려면 바쁘기 마련이고, 자매지간에 동생에게 바쁜 일손을 돕도록 말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마르다를 향해 마리아가 선택한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대접하려고 한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을 비슷한 경우인 아브라함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보자 달려나가 영접하고, 발 씻을 물을 준비해서 발을 씻게 하였고, 사라에게 속히 그들을 대접할 떡을 만들라고 하였으며, 하인을 시켜서 송아지로 요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고 시중들었는데, 주님께서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고 받아들이셨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 이름을 부르며 안타까워하셨는데, 마르다의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보면, 당시 마르다는 분주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헬라어의 원문 뜻을 살펴보면, ‘분주한지라’(페리에스파토)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이고, ‘염려하고’(메림나스)는 ‘흩어지다’, ‘나누어지다’라는 의미로 과한 욕심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 ‘근심하나’(도뤼바제)는 ‘문제를 야기시키다’라는 의미로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심리 상태가 일이 많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르다의 심리적 상태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더욱이 성공하기 위해 경쟁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한국인의 모습은 세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일 중독증(Workaholic)에 빠진 한국인들을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일 외에 자신을 지탱할 정신적인 힘이 없는 상태에 있다. 일 중독증은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처럼 중추신경 흥분제에 쾌감을 느끼는 증상과 비슷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들어서 자신의 건강과 인격, 그리고 가족 관계와 인간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일로 마음이 나누어지고 자신을 힘들게 만들면, 가장 좋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안타깝게 여기며 하신 말씀이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이다. 세상의 바쁜 일과 삶의 무게에서 정신없이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인 예수님 발아래에 나아가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경청하듯이 듣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리폼드 신학교의 스티브 브라운 교수는 은퇴 후 출간한 책 『What Was I Thinking? : Things I’ve Learned since I Knew It All』(다 알았다고 생각한 이후 내가 배운 것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갖고 있더라도 실제적인 만남 속에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우리의 참된 복음과 신앙이 이론적인 지식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주님 발 아래 가장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관계를 형성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리아의 자리는 항상 예수님의 발 아래였다. 예수님의 발 아래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눅 10:39),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위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으며(요 11:32),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았다(요 12:3).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예수님 발 아래 여인”이라고 부른다. 마리아의 모습에서 마르바 던(Marva Dawn)이 쓴 책 『A Royal “Waste”of Time』(고귀한 시간 낭비)가 떠오른다. 주님 발 아래 앉은 모습은 생산적이지 않았고, 향유 옥합을 깨뜨린 행위는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가 바라보는 대상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존귀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에 그녀의 모습과 행위는 고귀한 것이다. 
   
성경에서 마리아처럼 주님과의 친밀함을 구하는 자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을 숨김없이 알리셨다(창 18:17).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친구와 같이 대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임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머물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십계명을 받았다(출 34:28).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통일 왕국과 이방 나라를 물리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일에 있지 아니하고 항상 하나님의 얼굴에 있었다(시 25:15). 

그리고 다윗은 시편 27:4의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는 고백처럼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원하셨던 한 가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여 하나님 앞에 거하는 것이 그가 추구한 한 가지 일임을 노래하였다. 앙망하는 것은 경주마가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양쪽 눈 곁을 가려 주는 것으로 하나님 한 분에게 내 눈의 시선을 고정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그 가운데 많은 일로 염려하며, 근심하는 자들에게 오늘도 말씀하신다.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을 앙망하는 자리에 있기를, 그 한 가지가 가장 좋은 것임을 알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지금 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 발 아래서 고귀한 시간 낭비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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