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알려 주는 다양한 분별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박준형 칼럼니스트(캐나다)


성경의 문자적 수용과 해석하는 공동체

미국의 기독 실업인이 출판한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입니다(개정판 제목; 성경적 재정수업)』(베다니출판사, 1995)라는 책은 집필 동기부터 우리의 정신을 바짝 들게 한다. 사람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첫 장은 ‘왜 크리스천은 부요하면 안 되나’라는 항의로 시작되고, 마지막 장은 성경적으로 마무리된다. “형통하고 성공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면 된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말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행하라!”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재정 책임자이시고, 성경은 재정 관리 지침서이다. 성경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사업이 안 되고 죽 쑤는 것은, 성경대로 안 하기 때문이다, 이 멍청아!’ 정도가 된다.

이 책을 요약하면, 지금 사업에 죽을 쑤는 자들은 이 책대로 해서 사업에 성공하라는 것이고, 이 모든 노하우는 바로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숨어 있는 성경 구절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가서에서 보여지는 정의로우신 하나님. 욥기에서 보여지는 이유 없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의 저자가 강조한 예수님 말씀의 정수인 산상수훈. 

그리고 『팬인가 제자인가』의 카일 아이들만이 말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반드시 누가복음 9장 23절과 같이 읽어야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경을 대단히 희망적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무엇인지,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는 또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고 싶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만화경 보듯이 한쪽 눈으로만 화면을 넘기며 보는 게 아니다. 또 중국집에 가면 후식으로 주는 ‘행운의 쿠키’처럼, 그저 그런 재미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우리 자신을 전폭적으로 내맡기는 행위이다. 이는 간 보고 맛보는 것으로 끝나는 피상적인 성경 읽기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키게 하는 자기부인/자기 포기의 경험과 같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비우고, 목적과 집착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집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간과 문맥의 차이가 보이고 문장 위아래의 빈 공간까지 읽혀진다. 그래야 하나님의 숨은, 크고 높은 진리가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드디어 우리 삶의 실재가 된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성경은 내가 주체적으로 읽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리어 내가 읽혀진다는 사실이다(계 10:8-11).

이런 과정에서 조심할 것은, 그 어떤 문자적인 오류에도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성경 이해나 믿음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최소한의 가능한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같이 읽고, 같이 이해하고, 같이 수용하고, 같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지난 2천 년 간 건재한 이유는성경의 활자가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여져서가 아니라, 성경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처한 시간과 상황에서, 공동체와 함께, 가장 적절하게 읽혀졌기 때문이고, 공동체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전히 변함없는 동일한 문자의 총합에 불과하지만, 성경이 가진 이런 해석과 적용의 유연성과 역동성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열려 있는 ‘해석적인 공동체’(hermeneutical community) 안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된다.

‘해석’ 혹은 ‘공동체’가 쉬운 말은 아니지만(미국 기독교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대로라면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만한 말도 아니다. 지난 세월 한국교회에서 ‘성경 해석’은 목사나 신학자들의 몫이었고, 일반인들은 이들의 말을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소위 분별을 공부하는 학생이고 신앙의 성숙을 갈망하는 신자라면, 이런 기존의 일방적인 패러다임(목사는 말하고 신도는 믿고 따르는)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 목사라는 직분과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사건 신도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할 때 성경을 제대로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건강한 교회는 목사가 교인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한데 모여 같이 공부한다. 성경 해석의 주체는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그러니 답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상 위의 목사가 신자와 같이 학생 신분으로 내려올 때, 해석하고 해석이 가능한 열린 공동체가 탄생된다. 이런 길이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 길이 맞다, 라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공동체를 위해서,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한 성경 이해가 아니라 개인의 사적 공간과 영역으로 국한될 때, 성경은 분별의 범위를 훌쩍 초월해 공동의 선을 파괴하는 고삐 풀린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이런 해석의 지혜를 갈구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없이 분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라는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분별의 근본적인 권위는 두말할 나위없이 성경 말씀이다. 분별의 지혜를 갈망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그리고 항상 묵상하라. 시편 1편의 말씀에서와 같이, 복 있는 사람은, 아니 복을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순진하게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지는 말길 바란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문자 그대로 믿는 것과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 깊이 사고하고 상상하고 성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문자적인 통독과 속독의 수준을 넘어 ‘분별의 눈’으로 말씀을 읽으려고 노력하라. 이 분별의 눈은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어렵게 읽는 것이다. 이건 바로 질문하고 상상하고 의심하고 인정하고 확신하는 신앙의 전 과정이 투영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장 정직하게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말씀과 같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고, 교회와 사람들로부터 ‘분별하는 자’라는 영광된 칭호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이 우리의 모든 궁금증에 답하는 백과사전은 아니지만, 분별에 대해서 특히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말씀들이 있다. 그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있어서 흔들림 없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판단의 원천이다. 

이제부터 마음의 문을 열고 성경이 알려 주는 다양한 분별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같이 읽고 나누고 묵상하면 더 좋겠다. 말씀에 대해 반응하는 서로의 감정과 생각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눠 보자. 이런 나눔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게 맞는 분별의 지혜를 갈구하고 습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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