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그러니 “와 보라!”

김광섭 목사(샴버그침례교회 담임)


30년 전 이맘때만 해도 교회마다 금요 철야 예배가 11시에 있었다. 기도가 뜨겁던 교회에서 교인들은 새벽 4시, 5시까지 기도한 후, 어떤 분들은 잠시 눈을 붙인 후 일하러 가기도 했고, 기도원에 가서 철야 기도한 분들 중 더러는 곧장 일터로 출근하기도 했다. 이는 2천 년전 성경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고 충분히 기억할 만큼 가까운 때에 현재 교회 생활을 하는 많은 교인들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추세라면 금요 기도회는 곧 없어질 것 같다. 참석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기에 금요 기도회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기고, 때로는 억지로 교인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부서별, 구역별 헌신 예배 등을 계획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을 보완하면 기도가 더 잘 될까? 금요 기도회를 살리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책무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그리스도인들과 바울은 떡을 떼고 한밤중까지 말씀을 나누며 신앙적인 질문과 대답을 통해 진지한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곳을 떠날 것이기에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바울의 마음과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 드로아 교인들의 갈급한 마음이 합해진 밤이었다.

그런데 모임 시간이 길어지고 밤이 깊어지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 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조그마한 마을의 교회 모임에서 청년이 떨어져 죽는 일은 금세 소문이 날 것이고 오랫동안 강론했던 사도 바울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삼층 다락방에 있던 그들은 모두 내려가 죽은 유두고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바울이 내려가 그를 안고 그가 살았다고 말하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교회는 그때 영적 실재,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경험했다.

이후 이들은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말 그대로 그들은 철야했다. 유두고 사건이 있기 전에 그들의 모임이 배우려는 진지한 마음으로 채워졌다면, 이제는 죽었다가 살아난 유두고의 일로 그들 마음은 한층 고무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과 이로 인해 일어난 기적을 체험했기에 생기가 넘쳤을 것이다. 

그렇다. 한 세대 전 밤새워 기도했을 때는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보고 듣고 할 때였다. 문제 해결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넘쳐났고, 병자의 치유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일 등 가시적인 복음 사역의 결과들이 있었기에 밤새워 하나님께 매달리고 통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현실적 의미를 가졌다. 영적 실재, 즉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본 그들이 그날 일터나 집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했을지 상상해 보라.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얼마나 신나게 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이는 것을 얼마나 사모했겠는가! 이렇듯 영적 실재가 있으면 교회는 다시 기도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영적 실재가 교회나 성도의 삶에서 희미해졌다. 이전처럼 “와 보라!”고 자신 있게 선포하기보다는, 교회도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사람들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지레 겁먹고 주의를 준다. 

우리는 바로 영적 실재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그것을 우리의 모임과 삶에서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고백과 선포가 진실한 것이 된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포하기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 것은 필수이다. 교회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 가운데, 그리고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더욱 사모하며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그러니 “와 보라!”고 기쁨과 확신에 찬 선포와 초청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