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손자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전도지를 돌리는 사람이 젤리 하나가 달랑 달린 전도지를 주었다. 그분이 서 있는 곳이 목적지라서 잠시 손자를 내려놓고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다니는 손자를 보고 예쁘다는 말과 함께 말을 걸었다. 일단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자는 집에 걸어 놓은 액자들의 성구를 모두 외운다. 손자가 성구를 외우는 것을 보고 그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손자의 그 모습을 보면 더 반가워야 한다. 그러나 손자가 외우는 것이 성구라는 것은 이미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손자에게 성구를 외우게 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교회로 오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정말 슬픈 일이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적대감이 들까. 적대감은 아니더라도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거의 반사적이다. 경쟁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들은 서로 경쟁한다. 그러니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적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교회의 크기다. 목사의 유명도이다. 이 사실보다 불행한 일은 없다. 교회가 스스로 교회가 아님을 선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큰 교회를 다니면 우월감을 가지거나 최소한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작은 교회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교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고 물으면 조그만 소리로 그냥 작은 교회라고 대답한다. 작다는 사실이 부끄러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교회가 크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회가 진리로부터 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짜 교회는 결코 커지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커질 수 없다. 먼저 복음대로의 삶을 요구하는 교회는 교인이 늘어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교회가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와 같다. 어떤 생명도 디엔에이에 새겨져 있는 크기 이상으로 커지지 않는다. 돌연변이라 해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조금 더 크거나 작은 경우는 있지만 두 배, 혹은 그 이상 차이가 벌어지는 경우는 없다.

목사의 유명도 역시 교회의 크기가 기준이 되는 것 이상으로 해롭다. 개인의 능력으로 교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물론 목사의 능력에 따라 주님이 당신의 양을 조금 더 맡겨주실  수는 있다. 그러나 수만 명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주님은 당신의 양을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분이시다. 수만 명의 양들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을 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목자는 없다. 

생각해보라. 목자는 자신의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단숨에 알아차린다. 대부분의 목자들은 자신이 기르는 양에 이름을 붙이거나 적어도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마리가 없어져도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양을 위탁받은 목자도 주님의 양이다. 주님의 양으로서 섬김과 희생의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 그런데 양들이 많아지면 주님의 양을 위탁받은 양은 양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된다.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자신이 다른 양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우월감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반역이다. 그것도 가장 큰 반역인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자리를 향해 가도록 만든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교회에서 전도지를 안 돌리는가. 나는 아직 전도지를 안 돌리는 교회를 보지 못했다. 혹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왜 전도지를 안 돌리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셨다. 이것이 기준이 아닐까. 결국 주님이 위탁하시는 양의 한계는 백 마리가 아닐까. 나 같은 사람의 경우는 백 마리도 너무 많은 것 같다. 내 경우는 아무리 많아도 삼십 마리 이상은 무리일 것 같다.

교회의 크기와 목사의 능력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방식은 이 시대의 기준이고 그것은 곧 교회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목사의 몸이거나 맘몬의 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아무리 내 몸을 찢어 나눌지라도 내가 줄 수 있는 사람은 백 명 넘을 수 없다. 아무리 내 피를 마시게 해도 그 피를 백 명 이상에게 나누는 것은 무리이다. 주님의 양을 맡은 목자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교인 가운데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원엘 가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배울 수 없는 아이도 가르쳤다. 겨우 둘을 가르치는데 저녁 시간을 다 보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한 아이씩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수만 명을 가르칠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말처럼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안아줄 수 있고 그 방식만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방식 이외의 모든 방식은 비인간화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선한 목적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이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방식 이외에는 다른 존재 방식이 있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손을 마주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눈높이만 달라져도 그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다.

“유스티아누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적으로 배워야 할 핵심 사항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삶에서 반드시 따라야 할 지침이다. 유스티아누스는 만약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단지 인용할 뿐 그것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의 공동체는 그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더 나아가 유스티아누스는 기독교 증언의 효율성은 신자들의 온전한 삶의 방식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행하며 사는 이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대로 살 때’만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허락한다.”(41) 

유스티아누스의 이 말이 실감난다. 교회는 커질 수 없다. 교회는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의 능력은 사랑 안에서 용해되어 사라진다. 교회는 오늘도 나의 사랑이다. 그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행하며 사는 이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대로 살 때’만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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