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그동안 내가 쓴  글이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을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는 위선이다. 그래도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강조하라고 한다면 나는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고 싶다. 

믿음을 강조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오래도록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최소한 행위를 강조한다면 위선이라도 인류에게 더 유익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도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며칠 전 작은 아이와 대화 중 기도에 관한  이야길 들었다. 같은 직장의 그리스도인 동료가 미혼인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날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 기도의 내용이 가관이었다. “키 183에 쌍꺼풀 없는 눈을 가진 남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 내용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핵심인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기도도 이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보았던 기도원의 플래카드 문구가 떠오른다. “교회 문제, 가정 문제, 사업 문제. 배우자 문제 - 24시간 기도”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그래서 기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습 문제가 불거지기 얼마 전만 해도 M 교회는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는 교회였다. 특히 M 교회의 새벽기도는 유명했다. 3부로 나누어 새벽기도를 드릴 정도로 새벽기도는 활기에 넘쳤고, 거리가 멀어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권역을 나누어 곳곳에 기도 처소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본당에서 드리는 새벽기도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 주변의 아파트 시세가 올라갔다. 

정용섭 목사는  M 교회 담임 목사의 설교 내용을 “예수 성공, 불신 실패”로 요약했다. 이런 내용의 기도가 하나님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예수님은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한 지침으로 이 말씀보다 구체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다. 그것을 먼저 구하지 않는다면, 24시간 쉬지 않고 기도해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예수의 제자도 아니다.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게 된 지 오래 되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 순간적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가족을 위한 기도도 거의 드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위의 말씀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것을 더해 주신다.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것들로 말이다. 때론 주님이  인색하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주님의 인색함이야말로 영적인 유익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막막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욕망의 존재이며, 죄의 법에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그것을 먼저 구할 수 있는가. 

쉽다. 아주 쉽다.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시간에 서 로벨또 신부님의 타인을 위한 기도를 공동의 기도로 드린다.

"주여, 나날이 내 자신을 잊으면서 살도록 하여 주소서,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도 나의 기도는 "타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주여, 내가 모든 일을 진지하고 진실되게 행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타인'을 향한 것이 되도록 도와 주소서.

내 몸이 박해받아 죽고, 또 땅에 깊이 묻혀, 그래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더라도, 나의 수고는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면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지상에서 내 일이 끝나고 천상에서 새로운 일이 맡겨졌을 때. "타인"을 향한 생각으로 내가 받은 왕관을 잊도록 하여 주소서.

주여, "타인", 예, "타인"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신조가 되게 하여 주소서,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도록 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살고 타인을 위해 죽는다는 말이다. 타인을 위한 삶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삶이다. 서 로벨또 신부님은 이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위선이라는 영적 함정이다. 자칫 행위는 위선에 빠지게 만드는 올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보다 어떤 인간이 될까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거룩함의 기초를 행위에 두지 말고 됨됨이에 두도록 하라.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본질적 됨됨이에 있어 위대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기도는 조율의 시간이다.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묵상이 바로 이 기도다.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조율하는 기준음이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님은 숙련된 조율사가 되셔서 우리를 조율해 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됨됨이에서 나오는 거룩한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일치된 믿음과 행위는 서로를 강화하는 선순환을 이뤄낸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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