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오늘날 집은 거주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견인하는 주체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집이라는 프로를 보면 사람의 필생의 작품이 집이 된 경우를 보기가 어렵지 않다. 멍하니 앉아서 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성서에는 집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 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끝장날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화려한 집이지만 집 자체를 문제로 제기하지 않는다. 집의 넓이라던가 가격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화려한 왕궁’이라는 말이 신약에 등장하지만 그것도 집 자체가 아니라 화려하고 사치한 삶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나는 집이 맘몬의 은신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안한 집(거주하는 곳으로)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삶과 과시적인 자랑을 위한 집을 사모한다. 집 자체가 탐욕의 대상이 되었고, 맘몬의 은신처가 된 것이다. 맘몬은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좋은 대상을 발견했다.

나도 그 기분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삼십 대에 분당에 사십팔 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그것도 유산이나 융자를 끼지 않고 우리가 번 돈만으로 이루어냈다. 누나의 친구 한 분은 그런 나를 보고 성공했다는 말을 했다. 그땐 그냥 웃었다. 하지만 정말 성공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집을 잃은 후였다.

집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어디에 얼마나 비싼 집을 가졌는가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것의 실상은 맘몬이다. 얼마짜리 집에 사느냐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맘몬에 복종하는 사람들로 길들여지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현상 역시 소유와 존재의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집이 탐욕의 대상으로 지금처럼 공고한 위치를 가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화려한 성이나 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의 로망이 되었던 적은 없다. 

그래서 집이 환대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대문을 두드릴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언제나 여분의 이불과 빵조각과 양초를 준비해 둔 것으로 유명했던 것은 그들의 집이 언제든지 환대의 장소로 제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집이 탐욕의 대상이 되고, 맘몬의 은신처가 된 후 집의 용도는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집은 환대의 장소로 누구에게나 제공될 수 없다. 그만큼 집이 고귀해진 것이다. 

그러나 집의 이러한 변신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다른 것들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그리스도인들도 집의 변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집값이 올라가서 집을 못 사게 된 젊은이나 이웃을 걱정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없다. 집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살 수 있게 해주거나 거주할 장소를 제공해 주려는 사람들도 보기 어렵다. 

미국의 경우가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글과 페이스북과 애플 등 황금알을 낳는 기업이 된 플랫폼 기업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 밸리는 집값과 집세가 비싸기로 유명하다. 황금알을 낳는 기업이라 불리는 만큼 그런 기업들이 몰려 있는 그곳 사람들의 소득 수준은 세계 평균은 물론 미국 평균과 비교해도 월등하게 높다. 그러나 소득이 높아진 만큼 상대적으로 집값과 집세가 더 높아졌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의 주거는 불안정하다. 노숙자들의 증가는 물론, 소득이 높은 사람들까지 그곳의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캠핑카를 구입해 살고 있다. 그런데 캠핑카의 주차비가 환율이 오르기 전 시세로 백오십만 원이 넘었다. 그마저도 자리가 없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한국의 상황 역시 급변하고 있다. 부자들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자신들의 집값은 물론 집이 있는 장소의 땅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예를 들어, 김연아 부부의 신혼집이 들어오면 그곳 집값이 올라간다. 집값에 따라 땅값 역시 올라간다. 대통령은 절대농지 같은 것을 하찮게 여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는 사막 아닌 사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어 있어도 땅값이 비싸 가난한 사람은 물론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도 땅을 이용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의 천국이 될 것이다. 그 말은 곧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잃게 되고 부자들에게 종속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상황이 실리콘 밸리와 같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깨어 있는 사람들의 등장이 시급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되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더욱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미 대기업은 물론 부자 소유의 땅들이 개발 가능성이 있거나 입지가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통일교는 물론 대형교회들 역시 땅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미 몇 차례의 집값 상승으로 홍역을 치렀지만 땅값 상승으로 인한 충격은 집값 상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옛말이 아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것이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 준다. 낯선 나그네들로 살았고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들은 낯선 사람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달라졌는가.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길손과 나그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은 로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희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이유 한가운데에 집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격세지감을 느끼는가. 이것이 다시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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