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밖으로 나가기 좋아하는 손자를 데리고 보라매 공원엘 간다. 곳곳에 어린아이들을 위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곳에 녀석을 내려놓으면 녀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게 자신의 관심이 가는 것으로 한참을 논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 노는 녀석을 촬영하면서 녀석의 위험한 상황에 대처한다.

조그만 녀석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간혹 젊은 여성이나 할아버지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녀석에게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한다. 그러면 녀석은 질겁하면서 내게로 뛰어온다. 그런 과정 자체가 웃음을 자아내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게 만든다. 그 대상이 거의 대부분 할머니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왜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까. 왜 젊은 남성들을 비롯하여 젊은 사람들, 심지어 손자 녀석과 비슷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여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할머니 가설이 있다.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문명이 태동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경수가 끊기고,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음에도 손자들을 보살피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문명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손자 녀석과의 외출 경험을 통해 할머니 가설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할머니들이 손자들을 보살피는 것에서 문명의 태동까지 상상하는 것이 비약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 가설을 통해 우리는 문명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문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문명은 공동체성이며 문명이 인간의 상생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필요조건을 넘어 필요충분조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이런 역할이 점차로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하철을 탈 때도 마찬가지지만 공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회적 역할이 사라진 것이다. 어쩌다 경찰 복장 비슷한 할아버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그런 복장을 하고 그냥 돌아다니거나 벤치에 앉아 있다. 그런 복장의 사람들은 시급 9,160원을 받고 공공근로를 하는 노인들이다. 내 친구도 하루에 세 시간씩 이 일을 하고 있다. 친구가 할 일이 없어 근무 시간에 내게 카톡을 보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냥 돌아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내 친구처럼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은 노인들이나 길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비롯해 우리 시대의 노인들은 사회의 주변 인물이 되거나 돌봐야 하는 애물단지 역할만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대책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 할머니의 역할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할머니 가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할머니들로 인해 문명이 태동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할머니들이 아이를 돌보는 일이 무슨 대수인가.

할머니 가설은 할머니의 역할뿐 아니라 할머니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비록 대부분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의 일이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태동은 자신만을 위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 역할의 표상이 바로 할머니들이었고 그것은 올바른 사유이다. 문명은 그렇게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태동할 수 있고, 그렇게 태동한 문명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공동체성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할머니 가설은 일종의 영성이다. 문명은 바로 이러한 할머니들처럼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형성되고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왜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할머니들은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경험을 했고, 그것이 무의식중에 손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근거로 작동한다. 

얼마 전 우리에게 처음으로 손자가 태어났을 때 아내의 친구는 아내에게 손자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기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손자들이 예쁘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아내의 친구가 그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쁜 손자를 안아 주고 돌보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할머니가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었다면 손자에 대한 기쁨이 그토록 크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경험, 특히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을 통해 할머니는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할머니 가설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던 이유를 실감한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환난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도 그래서 말씀을 받아드리는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인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환난을 극도로 기피한다. 환난을 하나님의 부재나 사랑의 부재, 혹은 자신의 믿음의 결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분위기 자체가 ‘힐링’이나 ‘소확행’과 같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믿음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환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태원 참사를 생각해보라. 당신의 마음에서 내 자식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공감하는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타인의 불행에 무조건적으로 그것도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할머니 가설이 문명 태동의 이유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타당하다. 사회에 공동체성이 존재하려면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할머니들이 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런 공동체성의 완성이다. 가장 완벽한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상조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상조회도 결국 상조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좋은 교회도 교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상조회의 필요성과 순기능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상조회로는 하나님 나라를 흉내 낼 수 없다.

결국 교회란 타인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을 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일탈의 이유를 목사에게서 찾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부재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야 교회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해보라. 오늘날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할머니 가설은 그런 오늘날의 교회에 통찰을 제공한다. 그래서 오늘도 내게 환난을 주시고 더 이상 내 교회를 상상할 수 없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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