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 (25)

임다니엘 목사(크리스찬저널 편집부장)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7마일 떨어진 마을로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무덤이 비어있다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날이 저무는 저녁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Cleopas)였고,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가족 중 아내 또는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향해 걸으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이들은 왜 예루살렘을 떠났을까? 유월절이 끝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계속 있다가는 예수님의 추종자로 몰려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서일까?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제일 큰 이유는 성경에 쓰인 모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성경인 구약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믿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구원하고 다윗 왕조와 같은 강력한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였다. 그러한 신앙의 가치관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함께 걸으셨다(15절).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했다(16절). 요한복음 20,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제자들, 도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바로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자신이 예수님임을 알려 주셨다. 그러나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곧바로 알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있는지 물으셨다. 이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가득했다(17절).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제자가 오히려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느냐고 반문했다(18절). 이에 예수님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다시 묻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일이라고 밝히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였는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했다(18-20절). 21절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이해하는 메시아는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해방하고 강력한 메시아의 지도력 아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일 수도 있을 거라던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의 희망과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들이 슬픔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만 생각하고 정작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7절) 라고 예언한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25절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며,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말한다(26절). 그들은 본인들이 기대하고 이해한 메시아사상에 갇혀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지 못했다.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했을 때도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못했다(22-24절).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부활과 회당장 야이로 딸의 부활, 그리고 죽은 나사로의 부활을 보거나 들었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은 기대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모세의 글인 모세오경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지자의 글인 예언서와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전체를 찾아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27절).

대표적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받으시는 말씀은 시편 22:6-8, 18; 27:12; 41:9; 이사야 50:6; 53:3-9; 스가랴 11:13에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말씀들이 엠마오로 향한 두 제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사상과 일치하지 않은 것이기에 찾지 않았다. 그들은 듣고 싶은 말씀만 들었다. 메시아는 다윗 왕의 자손으로 위대한 정치 지도자이고(렘 23:5), 율법에 정통하고 그것의 계명들을 지키며(사 11:2-5),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로서 위대한 재판장(렘 33:15)이라는 말씀만 들었다.

간혹 우리도 선별적으로 성경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복만을 구하는 기복주의적 신앙관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는 것이 어렵다. 예를 들어 신년을 맞이해서 말씀 뽑기를 하곤 하는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 3서 1:2) 또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같은 말씀을 올해의 말씀으로 받고 싶어 한다.

반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와 같은 헌신과 섬김의 말씀들은 마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경에는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가 있지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회개하는 기도(출 32:31-32)도 있고,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약 5:14)는 말씀도 있지만, 병 낫기를 세 번 간구한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고 하신 말씀도 있다.

성경 말씀을 편식하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바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슬픔에 빠진 두 제자에게 주님은 오셔서 만나 주셨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에게 동행해 주시고 말씀을 자세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예루살렘을 떠난 그들이 기거하기를 간청할 때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함께해 주셨다. 이어 그들과 함께 거하며 축복하시고 떡을 나눌 때 자신을 보여 주셨다. 그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을 깨달아 알아 돌이키길 원하셨다. 나중에 이 두 제자가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라며, 이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아 마음이 감동했다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말씀은 변치 않고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을 편애 없이 믿을 때 소망 되신 주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되고 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이고 복이다.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볼 때 소망이 되살아나며, 다시 주님이 계시는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진실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는다면,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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