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게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읽은 때는 이십여 년 전이었다. 그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큰 울림을 주었고,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라 교회에 관한  지평을 넓혀 주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대조사회”였다. 

대조사회란 교회 공동체, 혹은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문화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물론 교회에는 교회 고유의 문화가 있다. 하지만 대조사회는 그런 고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조사회는 세상의 문화와 완전히 다른 문화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우월하여 세상의 문화를 대치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문화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대조사회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곧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야말로 개인은 물론 세상 전체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다. 천지개벽이란 온 세상의 질서가 바뀌는 것이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경천동지할 만큼의 천지개벽이 일어나게 만드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사회를 이루는 교회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서 하나의 문화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의 문화로서 대조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복음의 산물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보여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교회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과 대조를 이루는 대조사회라는 사실 역시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대조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고 있느냐 아니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과연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던져야 할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현저한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가장 먼저 제자도를 필두로 지배의 단념, 폭력의 단념, 공동의 소유, 사회적 장벽의 철폐, 성령의 현존, 형제애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이 모습이 바로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조금 전에 던진 질문에 답을 해보라. 누구라도 나와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값을 교회로 가져오라고 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며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간단하다. 복음이 변질된 것이다. 아니 복음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왜곡하고  희석한 것이다. 그 핵심에 제자도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읽는 책의 주제는 제자도이다. 제자도에 관해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직 제자도에 관한 언급을 할 때만 “급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 이외의 다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언급하면 자동으로 귀가 닫힌다. 그런 건 이단들이나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조사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의 사회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제자도를 하나님 나라의 특성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오늘날 복음에 가장 큰 장애물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교회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너무도 공교하게 복음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복음의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전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고, 그곳에서 의식으로서의 예배(Litergy)만 강조하게 되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은 더 이상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제도권 교회를 떠난 이유이며 지금도 여전히 대조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교회를 꿈꾸는 이유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다. 문화란 강요에 의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를 바꾸고 변혁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문화를 바꿀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증거가 문화적인 형태를 이루고 그들이 이뤄낸 문화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의 문화를 능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는 문화를 보고, 세상의 사람들이 세상의 문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는 문화를 사모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이겼던 바로 그 방식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는가. 오늘도 순교는 동일하게 요구된다.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아도 죽어야 하는 순교의 방식은 동일하다. 또 그것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십자가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기 위해 당신의 자녀들을 변화시키신다. 나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 사명은 내가 있는 이곳에 대조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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