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박주환 신부가 자신의 SNS에 올렸다는 내용이다. “윤석열과 국짐당이 경찰을 죽였다. (경찰) 여러분들에게는 무기고가 있음을 잊지 말라”  “대통령 전용기 추락을 빈다.” 많은 사람들이 박주환 신부보다 그를 징계한 가톨릭을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는 관성에 의해 우리가 가진 세계관에 따라 자동적인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생각에 언제나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는 자신도 모르게 다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일어난다. 특히 인간의 사고 안에는 자기방어기재가 늘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의식을 인식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래야 한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이 기도가 바로 깨어 있음을 위한 기도이다. 쉽지 않은 기도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나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지는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가 지셔야 하는 십자가의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내 뜻을 내려놓기 위한 기도가 아니다. 나는 가급적 신학적인 언급을 자제하므로 설명을 하지 않지만, 애초에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예수님이 처하셨던 이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분은 그렇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깨어 있는 상태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것이다.

예수의 제자란 바로 예수의 이런 모습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라도 예수의 제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예수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까.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오늘날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단정을 지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박주환 신부의 글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그가 올린 내용에서 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폭력이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은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그의 사고 안에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가 들어 있다. 이것이 예수의 제자에게 가능한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의 단념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의 가장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폭력을 단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어떤 불의도 선의 도구로 바꾸실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한 세상의 폭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가장 잔인한 폭력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기적(선)을 낳았다. 

목사가 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 폭력의 단념이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다툼을 하거나 싸울 수가 없었다. 물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말다툼의 경우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어야 했다. 당연히 세상의 관점으로는 정당한 일이다. 억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폭력의 단념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의 삶의 가장 현저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폭력의 단념을 말하는 내게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하여 질문을 던진다. “강도가 침입하여 아내와 딸을 강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와 같은 질문들이다. 질문자의 의도대로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단 정답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생각난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 미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히틀러 암살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언급하며 폭력의 사용의 불가피성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나는 본회퍼 목사님이 하늘에서 자신의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폭력이란 절대로 없어야 한다. 폭력의 단념은 현실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원한 존재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죽음 이후의 미래가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연관되기도 한다. 폭력의 단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래서 폭력의 단념은 자연스럽게 원수 사랑과 연결된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우리는 원수 사랑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적어도 사랑하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원수 사랑을 삶의 방식으로 삼았다. 누구라도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사랑은 당위가 아니라 반사행동이 되어야 한다. 

더크 빌렘스(Dirk Willems)가 생각난다. 아나뱁티스트였던 그는 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탈옥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도망하던 중 쫓아오던 간수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졌다. 그 순간 더크 빌렘스는 도망을 멈추고 돌아서서 물에 빠진 간수를 건졌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재투옥된 후, 결국 화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더크 빌렘스에게 원수 사랑은 생각한 후 실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원수 사랑을 행했다. 그 결과로 그는 화형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이었다. 그는 증인으로서 예수의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원수 사랑이 일상의 삶이 된 그에게 주목해야 한다.

나는 증인으로서 예수의 제자의 삶의 엄중함이야말로 박주환 신부의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증인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정말 증인인가. 증인은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이 아니라 반사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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