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시 교회
아미시 교회

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최근 들어 나는 자주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삶은 행위이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던 개신교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교리로 억제하거나 죽여 왔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교리”를 기반으로 그리스도교 전체의 매우 공고한 축이 되었다. 인간은 행위로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에 인간이 더할 수 있는 것은 0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 은총 교리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은 가짜이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전에 다녔던 신학교의 교수 한 분은 『열매로 알리라』라는 제목의 책을 내고 곤혹을 치렀다. 제목이 은총의 교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비록 그분이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약간의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교리를 강조하는 이들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열매로 안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의 강조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행위는 존재의 변화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기도 하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형제자매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대로 돌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형제자매를 섬긴다는 것은 형제애를 기반으로 유무상통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보지 못한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곧바로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가 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님이자 인내의 교사이신 그분은 "믿음의 은총을 인내"와 결합함으로써 상황을 바꾸어놓으셨다. 예수님에게 인내는 단순히 근본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훈련이었다. 그리고 인내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강화된 인내의 실천은 인간 경험의 어느 분야에서라도, 설령 그것이 합법적인 것일지라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을 '바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주님이 구하신 적이 없었던, 그리고 절도나 폭력을 통해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재산을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상실의 경우 나타나는 인내는 베풂과 나눔의 훈련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들은 적들에게 신체적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공격을 당하거나, 압력을 받거나, 복수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그들은 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암기했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떠올려야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훈계한다. "어떤 이가 당신을 도발하며 싸움을 부추길 경우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저주하거나 당신과 승강이를 벌일 경우, 이 말씀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할 때. 기뻐하라.'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심을 지니고 그들의 압제자들을 지치게 하라고 촉구한다. "당신의 인내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치게 하라"(앨런 크라이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 김광남 옮김, Ivp, p.53)

이 내용을 잘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의 중요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내라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자랑한 이유는 환난이 그들에게 인내를 이루게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환난을 통해 그들 안에 생겨난 인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선교의 전부라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당신의 인내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치게 하라"는 말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원수들에게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행위로 원수들을 자매와 형제인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 상대방의 적대심을 허물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압제자들은 자발적 동의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스티아누스 역시 이런 말을 했다.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자들은, 비록 그들의 입술에 그분의 가르침이 있을지라도, 자기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인내를 이어온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가 아나뱁티스트들이다. 이들이 이뤄낸 일을 제3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들을 아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그들을 재세례파로 부르며 이단이라고 경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멸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주된 특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된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인내를 버리고 조급증에 사로잡힌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미시의 습관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미시들은 성서를 집에 보관하지 않고 마차에 보관한다. 그들은 2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는데 아미시들은 마차를 타고 교회에 가서 성서를 사용한 후 그것을 마차에 둔다. 그들은 날마다 성서를 읽지 않고 예배를 드릴 때에만 성서를 펼친다. 자의적 성서 해석을 하지 않기 위함이다. 자의적 성서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허한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것을 변명하기 위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의적 해석을 피하고 공동체적으로 성서를 읽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들은 검소한 삶을 지향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에 매진한다. 자매와 형제를 돌보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어느 때든 필요한 경우 자신들의 소유를 공유하고 나눈다.

박해를 피해 미국의 펜실베니아 근처에 둥지를 튼 그들은 거의 오백 년 동안 문명을 등지고 수공업 시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견인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들의 삶이다. 그들의 행위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원수들을 용서한다. 그들 가운데는 핍절한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는 이제 전통이 생겼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노출되어도 그들의 신앙은 함몰되지 않는다. 그들이 피터 모린이 말한 "자본주의의 바다 위에서 탈자본주의적 섬"이 된 것이다. 아무리 자본과 문명의 이기들이 그들을 유혹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한다. 우리는 아미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유스티아누스가 말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다. 아미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중한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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