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26)

임다니엘 목사(크리스찬저널 편집부장)


성경의 인물 중에 하나님의 구원과 속죄 사역을 위해 쓰임 받은 몇 사람들은 일반 상식 선에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해 기준으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수긍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 경우가 있다. 어쩌면 성경에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중 두 사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압 여인 룻이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나오미가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잃어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자신을 따라나선 며느리 룻에게 새 출발을 위해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룻은 죽기 전에는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룻은 이방 여인, 그것도 과부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제사나 절기, 규례와 같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나오미와 룻의 기업은 망하여 경작할 땅도, 재산도, 가계를 이을 자식도 없는 처지여서 룻의 말대로 하녀 중의 하녀의 위치였다.

그런 룻의 삶을 기록한 룻기서의 마지막 장에는 나오미가 보아스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자녀를 낳은 족보를 적어 놓았는데, 마지막 절은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2)이다. 룻기는 다윗의 등장으로 끝나는데, 마태복음 1장에 다윗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보아스만이 아닌 이방 여인 룻(마 1:5)이 들어감으로써 유대인은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었다. 룻이 모압을 떠나 나오미를 따라가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는 자로 과부인 이방 여인을 선택한 것은 오늘날뿐만이 아니라 당대에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약에서 살펴볼 인물은 세리였던 마태이다. 마태는 세리로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돈을 빼돌리기도 했던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죄인들도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기를 원하는 심정에 자신의 집에서 옛 동료와 죄인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마 9:9-1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자신들이 정한 율법의 세부 항목을 모두 지켜서 율법의 의로는 다른 유대인과 같지 않은, 경건한 자라고 스스로 여겼다. 

유대인들에게 함께 식사하는 것은 식사하는 자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에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바리새인의 태도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라며,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죄인(롬 3:23)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했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거부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가 나온다. 성전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내용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하였고,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기도했다.

성경은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 됨을 깨닫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는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게 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여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 

많은 비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성인군자와 같이 매우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살인마와 같은 큰 죄를 지은 악한 자는 아니라고 자부한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추악함과 수많은 죄를 나열해서 당신에게 말해 준다면 이를 인정하기보다 싫어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큰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려 죽어감에도 당장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반창고 정도만 바르고 집에 상비약이 있기에 굳이 의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학자 존 스토트(J. Stott)는 “불신자는 ‘자기 의’로 특정 지워지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으로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한 성도만이 ‘자기 혐오’와 ‘자기 절망’의 상태에 이르러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라고 말했다. 

마태는 세리로 사는 동안에는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고 변화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유대인들을 향한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되었다. 사복음서가 각각 특징을 갖고 있는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시작하여,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증거한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달자로 바리새인이나 율법 학자나 제사장이 아닌 세리였고 죄인이었으며 민족의 반역자였던 마태를 선택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자격의 논란을 만들기 충분한 사람을 하나님은 유대인의 복음 전달자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쓰셨다. 

세상은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 소위 스펙을 쌓아간다. 누구나 스펙을 잘 쌓아 경쟁력 있는 강한 자로 남길 원한다. 스펙에 흠이 되는 약점은 숨기거나 아예 만들어 내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져서 약함을 기뻐하고 도리어 약할 때 강하다고 고백한다(고후 12:9-10).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연약함이 많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았다고 했다. 

룻과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용납되지 않은 큰 약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약점을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위대한 능력을 보이시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 사실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룻과 마태를 쓰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격 없다고 할지라도 룻과 마태와 같은 자들을 쓰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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