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에서 1944년 5월1일 3 남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께서는 강릉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였었다. 그냥 평범한 가정으로 지났는데, 1950년 3월 부친께서 인천 모 고등학교로 전근 발령을 받고 인천으로 혼자 먼저 가셔서 자리를 잡고 여름 방학에 가족들을 모두 인천으로 이사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님께서 말해주셨다.

그러나 그해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터져서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었다. 그 후로 부친의 소식을 모르고 어머님께서는 27세에 어린 아들 3명을 데리고 홀로 되셨다. 90세에 천국 가시기 전까지 남편을 그리워하시다가 결국 확실한 소식도 모른 채 천국으로 떠나셨다.

인민군들이 강원도에도 들어와  아무 죄도 없는(군인 가족도 아니고, 경찰 가족도 아니고 면장이나 동장도 아니었다) 강릉시에서 외곽지역의 시골에 평범한  농부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자비하게 사살했다.

당시 6살이었던 저는 어머님께서 어린(9살, 6살, 2살) 세 아들을 키우기가 어려워 나를  할머니에게 보내 함께 지나게 했었는데, 당시 북한 공산당 인민군대의 악랄하고 무자비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을 지금까지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동네의 평범한 농부인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무자비하고 악랄하게 총살하여 갑자기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시골 농촌 동네가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동네로 변하였었다.

인천에 가셨던 부친도 그들의 악랄한 총칼에 희생되신 것 같다고 확실한 소식이 아니지만 지인에 의하여 먼 훗날 알려 주셨다. 조용하고 평범했던 한 가정이 무자비한 북한 공산당에 의하여 박살이 나 버렸다. 그 후 어머님께서는 아직 어린 세 아들을 혼자 키우시느라 엄청난 그 모진 시련을 겪으시며 아들들을 잘 키우셨다.

큰아들은 중국 선교사로, 둘째는 과테말라 선교사로, 셋째는 두 형의 선교를 돕는 선교사로 세 아들을 모두 주님께 헌납하셨다.

어머님이 어릴 적 자라셨던 외가는 오죽헌 권씨 집안으로 당시 부유하게 사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율곡 선생님의 어머님 사임당께서 이율곡 선생님을 해산하시기 위해 친정인 강릉에 오셔서 조선의 학자 이율곡 선생님을 탄생케 하셨다.

그 당시 사임당께서 태몽 꿈을 꾸셨던 그 방을 지금까지도” 몽룡실(夢龍室)”로 잘 보존하고 있다. 이율곡 선생님이  탄생하셨던 그 가정이 기울어 그 집을 외가에서 매입하시고 그 몽룡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율곡 선생님의 유비무한(有備無限)의 철학을  인정하고 그 집을 성역화(聖域化)하여 매년 제사(祭事)를 지내고 국가 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지금은 국가에서 관광지로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편집자주 - 최상득 선교사는 1974년 미국에 이민하여 시카고 휄로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 오케스트라 담당, 시무장로로 해외선교 위원장으로 섬기다가 2005년 목사 안수를 받고 SMF(Silver Mission Fellowship) 선교회에서 과테말라로 파송되었다. 2007년과 2013년,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했으며, 음악 사역, 신학교 강의, 불우 어린이 돕기, SETECA 신학교 분교 설치 등 18년간 과테말라에서 사역하고 지난 2022년 12월, 시카고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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