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3:1-3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곧 함께 사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함께 사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업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미국에 온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학문을 닦아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상투를 맞잡고 싸우는 조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고려인삼 장사꾼들이 구역 다툼 끝에 난투극을 벌인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탄식했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망국 백성이란 손가락질을 면할 수 있으랴?” 선생은 학업을 중단하고 동포들에게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는 함께 살 줄 아는 백성이라야 조국의 광복도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 사는 삶에 앞장서야 합니다. 
성경이 세상의 어떤 교과서보다도 함께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함께 사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사는 법을 실현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본래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지만 죄가 들어올 때 함께 사는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사는 관계를 회복시켜 죽게 된 인간을 살리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생애와 가르침은 함께 사는 관계 회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 예수님의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황금률은 문자 그대로 함께 사는 법의 제일 원리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함”(마 20:28)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말씀하신 그는 낮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마침내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법과 직결된다고 가르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먼저 사람과 함께 사는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횡적으로는 사람과 함께 사는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골고다에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꿈에 보니까 지옥 사람들은 너무 긴 숟가락으로 제 입에만 음식을 넣으려다 다 흘리고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하고, 천국 사람들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 떠먹여 주니까 모두 건강한 모습이더랍니다.  한 철인은 “자기중심적인 삶, 그것이 곧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교회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실습하는 곳입니다. 함께 사는 법이 깨어질 때 교회도 깨어집니다. 그리스도와 성도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함께 살고 성도와 성도가 지체와 지체의 관계로 함께 사는 삶이 실현될 때 생명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 사는 법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불러냄을 받은 사명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함께 사는 삶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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