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6월15일 현재 아내인 최경희(이경희)와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아내는 경희 대학 간호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국가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경희 대학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974년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빈곤 국가로 불리며 모든 국민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시  나는 5급 국가 공무원으로 가장 인기 없는 직업이었다.

양가  어머님의 소개로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는데, 두 가정이 별로 넉넉하지 못하여 앞으로 가정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게되었다. 이왕 어려운 바에야 미국에 이민가서 죽기 살기로 고생하면 그래도 한국에서 고생하는 것 보다 희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간호사가 부족하여 간호사 수입하는 미국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풍부하여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가  많이 부족 하였다. 젊은 여성들이 간호사가 힘든 직업이라고 간호대학에 지원하지 않아서 미국 전역에 병원마다 간호사 구하기가 어려워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 정부에서 부족한 간호사를 충족하기 위해 해외에서 간호사를 수입하기로 하고 한국,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서 정규 간호대학 출신으로 정식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간호사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당시 간호사 이민 중계소에 신청서만 내면  거의 100% 일 년 이내에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미국 이민 수속

이민 수속 중계소에서 일리노이의 한 병원에서 초청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 초청장을 중심으로 이민 수속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필자는 여러 가지 증명서가 필요했다.

본적지, 현주소, 중앙정보부, 현지 경찰서 등 신원조회, 병무청에서 병역증명서( 3년 군 복무 필했음), 세무서에서 세금 납부 증명서, 동 사무소에서 현지 거주 증명서, 본적지 호적등본 등등 많은 증명서를 요구하는데, 가는데 마다 바로 안 되고 10일 후에 오라 하여 가보면 아직 안 되었으니 일주일 후에 다시 와라 이리저리 핑계 대고 증명서 발급이 늦어지며 또한 가는데 마다 그렇게 불친절하고 무슨 죄인 취급하듯 했었다.

당시 국가에서는 되도록 많은 인력을 해외에 내 보라고 외치지만 정작 각급 증명서와 수속에 엄청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겨우 증명서들을 발급받고 해외 여권을 신청하게 되었다.

1974년 당시는 한국 외무부에서만 여권을 발급했는데 이 역시 모든 서류들을 갖추어 여권 신청을 했지만, 바로 안 되고 한 달, 10일, 일주일 후로 계속 미루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여권을 받게 되었다. 이제 출국 준비를 하는데 또 한 가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당시 한국에는 폐결핵이 많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에서 폐결핵 엑스레이(X- Rey) 사진을 들고 미국에 입국하라고 했다.지정 병원에 가서 폐결핵 사진을 찍고 그 필름을 들고 미국에 들어가는데 필름이 구겨지면 안 된다고 하여 이민 짐도 많은데 조심조심 그  커다란 폐결핵 사진을 손에 들고 출국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출국 2-3일 전 중앙정보부에서 출국 교육을 했다. 거의 하루를 교육받는데 해외에 나가면 북한 간첩들이 포섭하려고 하니까 이러이러한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며 반공 교육을 했다. 그 교육 받은 증명서가 있어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출국

1974년 9월 12일 드디어 그 많은 절차를 끝내고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는데  두 사람 다 넉넉하지 못하여 비행기도 월부로 하여 현지 도착 후 3개월 후부터 1년 6개월을 갚기로 하고 비행기 탑승권을 샀다. 당시는 한국 비행기는 미국에 노선이 없었고 미국 비행기 하나(Northwest airline)가 일본을 거쳐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들어 갔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내 마음에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굳게 다짐하였다.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미국에 가서 꿈을 펴 보겠다는 젊은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한국이 싫었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고국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조금 남아있다.

처음 타 보는 비행기

나이 30살이 되도록 한 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는 우리는 두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미국 비행기라 한국 승무원이 한 명도 없이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키가 큰 젊은 여성들이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외국 사람을 많이 대해 볼 기회가 없었던 우리는 그저 기가 죽어 있었다.

비행기 이륙하고 잠시 후에 승무원들이 계속하여 무엇을 물어 보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쳐다만 보았다. 계속하여 묻는데 짐작에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묻는 것 같은데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콕? 세븐업? 애플주스? 오렌지 쥬스? 크렌베리 주스?워러? 등을 묻는데 한가지 오렌지 주스만 들려서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여 장장 14시간 동안 오렌지 주스만 마시고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콜라, 사이다로 말했으니 미국 발음의 콕, 세븐업을 알아  듣지 못했다. 지금 생각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미국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물론 가족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과 미국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다른 세계였다. 미국 도착 후 가장 고통은 영어였다. 한국에서 영어를 12년간 배웠지만, 한마디도 말을 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책으로만 배운 영어는 실생활에서 죽은 영어였다. 그리고 문화도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 정식으로 미국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처음 기착지인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바로 영주권을 발급해 주었다. 영주권을 받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는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시카고에서 미국 생활이 시작 되었다. 원래 목적지는 일리노이 남단의 조그마한 마을의 작은 병원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신앙 생활할 때 출석했던 교회 부목사님이셨던 주연도 목사님께서 시카고의 트리니티 신학 대학원에 유학차 먼저 와 계셨다. 

그런데 우리가 일리노이 남단 조그마한 마을에 간다고 하니 목사님께서 적극 말리면서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 가면 너무 힘들고 정신적 충격으로 잘못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하시며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시카고에 머물라고 하셨다. 고용 계약으로 가기로 했던 병원에는 편지를 써서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시카고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안되고 길을 모르고 문화가 너무 달라서 적응 하는데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하나 좋은 것은 식품비가 매우 저렴하여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하던 바나나, 아이스크림 등 한 아름씩 사서 원 없이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 편집자주 - 최상득 선교사는 1974년 미국에 이민하여 시카고 휄로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 오케스트라 담당, 시무장로로 해외선교 위원장으로 섬기다가 2005년 목사 안수를 받고 SMF(Silver Mission Fellowship) 선교회에서 과테말라로 파송되었다. 2007년과 2013년,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했으며, 음악 사역, 신학교 강의, 불우 어린이 돕기, SETECA 신학교 분교 설치 등 18년간 과테말라에서 사역하고 지난 2022년 12월, 시카고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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