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겪는 낯선 이민 생활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아내는 경희대학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왔는데, 당시 미국에서는 자국 면허증을 6개월간 인증해 주고 그 후에는 미국 간호사 면허증(RN)을 받아야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병원에 취직하여 일하려니 한국 병원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병원 장비가 많아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고 설명을 해 주어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 계속 실수를 하게 되어 집에 돌아오면 매일 밤 펑펑 울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라대었다. 자동차도 없어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하는데 정류장 마다 어디라고 유니폼을 입은 점잖은 운전기사가 말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지나치기도 하고 옆 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내리곤 하였다.

나 자신도 처음에 취직을 하러 갔는데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사장이 뭐 라고 하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말을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오는데, 안내해 주셨던 분이 바쁜 일이 있으니 혼자 전철을 타고 가라고 했다. 시카고에는 지하철이 아니고 오히려 길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철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청량리역에서 인천까지 전철을 개통하고 축하하며 기뻐했었다. 바로 그날이 광복절  8.15 경축 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 당하셨던 날이었다. 또한 당일 많은 사람들이 처음 전철을 타보고 기뻐했던 날이었다.

우리도 그날 한 길 만 다니는 전철을 타며 신기해했다. 그래서 나의 기억에는 전철은 한 길이니까 처음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가면 거기가 처음 탔던 정류장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시카고 전철을 탔는데 아무리 가도 내려야 할 정류장이 안 나온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구나 하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갔는데 거기도 역시 처음 탄 정류장이 안 나온다. 다행인 것은 한번 전철역에 들어가면 몇 번을 타도 따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며 전철에서 헤맨 시간이 무려 4시간 이상 걸렸다. 배도 고프고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하는데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말이 안되지만 물어 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백인에게는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방금 당하고 왔기에  백인에게 말 걸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점잖게 보이는 흑인 아저씨에게 손짓 해 가며 내가 가야 할 정류장을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는데 고맙게도 그 흑인 아저씨가 내 말을 알아듣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45년이 지나도록 시카고 전철을 안 탄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카고 전철은 수십 갈래로 이어져 있어서 노선을 잘 알아서 타야 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1974년도 이민 생활이 눈물과 고통으로 시작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각오로 매달릴 곳은 위로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죽기 살기로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미국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 가는데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기쁜 소식이 왔다.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그날 간호사 RN (Resister Nurse )합격 통지서가 왔다. 그리고 첫 미국 시민권 아들을 순산했다. 그 동안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감사의 눈물이 펑펑 흐르며 아내의 손을 잡고 하늘에 감사했다. 그 후 아내는 정식 미국 간호사 자격으로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한 병원에서 35년간 일하고 정식 은퇴하여 현재는 과테말라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다.

당시 나는 임시로 작은 전자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의 일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우체국) 시험 준비를 6개월간 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이 되어 졸지에 정식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었다. 많은 정부 혜택을 받으며 26년을 근무하고 조기 은퇴하고 선교지로 나가게 되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오늘날까지 미국 생활에 어렵지 않게 지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두 아들도 잘 커서 각자 생활하고 미국 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선교사로 부르셨다.

* 편집자주 - 최상득 선교사는 1974년 미국에 이민하여 시카고 휄로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 오케스트라 담당, 시무장로로 해외선교 위원장으로 섬기다가 2005년 목사 안수를 받고 SMF(Silver Mission Fellowship) 선교회에서 과테말라로 파송되었다. 2007년과 2013년,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했으며, 음악 사역, 신학교 강의, 불우 어린이 돕기, SETECA 신학교 분교 설치 등 18년간 과테말라에서 사역하고 지난 2022년 12월, 시카고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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