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3:18-19

절벽에 핀 꽃을 따서 애인에게 던져준 젊은이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며 외쳤습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가곡 “물망초(Forget me not.)”에 얽힌 슬픈 전설입니다. 여인은 일평생 강물에 흘러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죽은 자의 비극보다 산 자의 생애가 더 애절합니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옵니다. 묵은해의 실패를 새해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공과 축복의 새해를 맞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슬프고 괴로운 일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속담대로 사는 사람은 복된 새해를 맞을 수 없습니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오리다.”라는 김소월의 시가 있습니다. 사실은 잊지 못해 생각이 난다기보다, 자꾸 생각하니까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약으로 삼아 잊혀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결단과 실천으로 지워버리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분하고 괴롭고 낯 뜨거웠던 일들을 잊지 못하고 매일 곱씹으며 산다면 평생 불행의 굴레를 벗지 못할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뒤엣것을 잊어버리라.” 바울이 이렇게 강조한 것은 지우고 싶은 자신의 과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성도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등 과거의 실수와 허물이 너무 부끄럽고 괴로워 벗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잊혀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의지와 결단으로 벗어버렸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의 삶에 얼룩진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들을 벗어버리고 잊어버리기 바랍니다. 
이해와 용서로 과거를 극복해야 합니다. 한용운은 “그는 간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요, 내가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간다.”고 읊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가는 님이지만 비난도 원망도 하지 않고 이해와 용서로 고요히 보내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의 비행과 배신과 실수가 비수처럼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도 모정은 한없는 이해로 그 자식을 감싸 안습니다. 성경은 매일 문을 열어놓고 가출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끝없는 용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만이 쓰라린 과거를 극복하고 축복의 새날을 앞당기는 열쇠입니다. 알렉산더 듀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원한에 사무친 한 인간의 통쾌한 복수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음모에 빠져 한순간에 청춘과 애인을 빼앗기고 암굴 속에 갇힌 19세 청년 에드몽 단테스는 숨겨진 보물의 비밀을 알아내고 탈옥에 성공하여 마침내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파리의 사교계에 등장, 원수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합니다. 그러나 복수 끝에 당테스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꿈에도 그리던 옛 애인이 복수의 화신이 된 당테스를 경멸하고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배신은 응징받아 마땅하지만, 복수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배신의 상처는 복수가 아니라 이해와 용서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진리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세상에는 수학 공식같이 딱 맞아떨어지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펴놓고 밤을 새워도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마음에 메모했다가 훗날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물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삼중고의 성녀 헬렌 켈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의 고난을 안고 일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이 내 평생의 의문에 밝히 대답해 주실 줄 나는 믿는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세수하듯 하루에 두 번 마음을 씻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날의 원망과 불평과 괴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신경쇠약이나 정신착란증에 걸리기 쉽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옛일을 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새 일을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이 믿음으로 새해를 맞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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