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강단 (34) “주님과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나의 표면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나의 진정한 필요를 말씀해 주실 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해야 한다.”

임다니엘 목사(크리스찬저널 편집부장)

소통은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서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가족과 교회, 직장 등에서 소통이 제대로 안 될 때는 오히려 문제가 커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소통의 문제는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부부 사이에 소통이 안 되면 작은 일에도 쉽게 다툴 수 있는데, 이때 남편이 생각하기를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라며, 큰맘 먹고 사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미안하다는 말이 ‘너 그만해’로 들릴 수가 있다. 마치 서로 불편한 상황을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뭘 잘못했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때 남편은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했는데 사과를 받아주기는커녕 뭘 잘못했는지 취조받는 상황이 되어 아내가 미워지고 울화가 치밀어 “미안하다고 말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받아친다. 그리고 “따져서 뭐 하는데, 지나간 일 자꾸만 들춰서 좋아질 것 없다”라고 가르치려 한다. 남편이 사과했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남편은 더는 ‘미안해’라는 말을 안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아내는 남편의 태도를 이해 못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금 전까지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한 마디 질문에 미안한 감정 없이 곧바로 화를 내고 가르치려고 하니 적반하장이다. 진실한 마음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아내 또한 다시는 남편이 사과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한다. 여기서 부부간의 소통은 끝나게 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가운데 냉전의 시간을 길게 갖게 된다.

이 부부의 소통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소통에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했고, 아내는 미안한 것이 어떤 잘못 때문인지 물어보았는데, 이 대화에서 심각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통 전문가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을 해준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들어서 상대의 내면에서 말하는 진정한 필요를 알고 소통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내는 소통 중에 감정이 상하면 다시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내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자 남편이 성급히 미안하다고 말해게 되면 아내는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풀리지 않은 감정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빨리 풀라는 식으로 느껴서 더 화가 난다고 한다. 남편이 아내의 감정을 헤아려 보지 않고, 아내의 내면의 필요를 살펴보지 않고 표면적으로만 소통하려고 한다면, 아내는 감정이 무시당한다고 느껴서 자존심이 상하고 감정이 더 나빠지는 것이다.

아내가 말하지 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남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숙제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내에게 내면의 필요를 직접 묻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진심으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준다고 느끼면 속 얘기를 할 것이다. 그때 남편이 인내하며 아내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다시 사과하지 않아도 아내의 마음은 풀려서 이내 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 대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가 억지로 자기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무리가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보통 이런 질문에 언제 여기에 왔다고 대답해 줄 수 있으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무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라고 바로 반응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응대하셨다. 

무리는 예수님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모세는 우리 조상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모세처럼 자신들을 먹여달라고 자신들이 예수님을 찾은 의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라며, 무리가 요구하는 빵이 아닌 생명을 주는 진정한 빵에 대해 말씀하신다. 

또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는데, 무리가 수군거리면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가?”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한다. 

그리고 무리가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무리는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라며, 기괴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그 후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고 따르지 않게 된다.

무리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무리의 관심사가 먹고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 그래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 무리가 어떤 의도로 말하고 있는지 아시면서도 그들이 말하고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닌, 그들의 내면에서 말하는 영혼의 진정한 필요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다. 

그들의 표면적인 요구가 그들에게 진정한 필요가 아니었다.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모를 때가 많다. 어쩌면 예수님 당시 무리도 주위에서 빵을 더 먹고 싶다고, 필요하다고 아우성치니 나도 필요한가 보다 하고 같이 외칠 수 있다. 주님과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나의 표면적인 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나의 진정한 필요를 말씀해 주실 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는 그렇게 반응했다. 무리와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자신에게 진정한 필요를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며, 자신의 필요를 말씀하신 주님과 소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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