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서부 아프리카의 조그마한 나라 감비아로 첫 선교의 문이 열렸다.

밴드 사역을 위하여서는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브라스 밴드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은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악기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악보가 필수적이다. 노래는 들어서 배울 수 있지만, 악기는 들어서 음악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우선 현지에 계신 이 선교사님께 연락하여 이러한 것을 설명하고 앞으로 1년 반 후에 그곳에 가니, 그동안 학생들을 선정하여 악보 활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씀드리고 가능하시겠느냐고 문의하였다.

선교사님께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며, 아내가 음악을 좀 아니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전혀 음악을 배어본 일이 없는 학생들이 악보를 읽으려면 1년 이상 시간이 필요하니 이른 시일 내에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렸다. 한 달 후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직 시작 못하셨다고 하시며 곧 시작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첫 번째 난관

이제 이쪽에서 준비할 사항이다. 첫 번째로시간을 내야 한다. 당시 직장에 근무하고 있을 때인데, 미 연방 공무원이라서 1년에 유급 휴가가 5주였다. 그러니까 1년 휴가 중 4주를 사용하여 밴드가 가능하겠는가 연구했다. 평소에는 악기를 전혀 배워본 일이 없는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소리를 내고 음악을 만들려면 일주일에 1시간씩 10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가서 1년을 있을 수 없어서 한 달 동안 매일 하루 8시간 연습을 하면 시간상으로는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두 번째는 휴가를 한 달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직장에서는 매년 6, 7, 8, 월(미국의 학교 여름 방학 기간)에는 모두가 그 기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아무리 오래 근무한 직원이라도 그 기간에는 2 주 이상 휴가를 할 수 없는 것이 문서로 된 법은 아니지만,그동안 한 번도  예외없이 지켜온 직원들 간의 규정이었다. 이 규정을 26년 근무하며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선교를 갈려면 적어도 한 달이 필요한데, 그것도 현지에서 7월이 방학이니까 방학 동안이라야 매일 학생들이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7월 한 달 휴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이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매년 12월에 각 개인의 다음 해 휴가 계획이 확정된다. 이미 올해 휴가 계획이 마감된 상태였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만일 휴가를 받지 못하면 아프리카 선교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생애에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고 섬기고 있던 교회에서 교회 창립이래 처음 단기 선교를 나가는 것이 된다. “하나님 제 생애에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선교를 나가려는데, 이러한 장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열심히 얼마 동안 기도하고,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 되어 하루는 용기를 내어 직장에 출근하여 아침에 우체국 국장님께 찾아갔다.

국장님께서 왜 왔느냐고 물으셔서 "사실 올해 7월에 아프리카에 선교를 가려고하는데, 한 달이 필요합니다. 물론 7월에 한 달을 휴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국장님 재량으로 허락이 가능하시면 허락해 주십시오. 만일 가능하지 않다면 아프리카 선교는 못하게 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보통 때 같으면 “그것도 안 됩니다”라고 했을 터인데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나에게 한 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 순간 0.01% 의 가능성이 있구나 생각하고 한 주일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국장실을 나왔다. 그 후 한 주간을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집사람과 어머님, 장모님, 아들들 가족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여 모두 열심히 기도했다.

일주일 후에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국장님께 찾아갔다. “국장님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문의했더니 국장님께서 미소를 띠고 쳐다보며 “갔다 오시오. 그 후의 책임은 내가 지겠소”라고 말씀하신다. 그 자리에서 할렐루야!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고 감사하다고 하고 국장실을 나왓는데, 나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더구나 합리적 사고 방식을 가진 미국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셨다. 이것 또한 인간의 계산으로서는 해석이 안 되는 분명한 하늘의 기적이었다.

미국의 건국은 청교도(기독교) 믿음에서 출발한 국가여서 미국의 문화는 기독교적인 문화이며 모든 국민 마음에는 기독교적인 마음들이 있어서 남을 돕는 일에는 솔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의미로 구제와 선교에 많은 관심이 있고 또 협조도 잘하는 것 같다. 이러한 미국에 살기에 선교도 가능했었다. 미국으로 불러 주신 것도 선교사로 만들기 위해 훈련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매년 7월에 한 달씩 선교지로 나가게 되었다. 3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직장은 매일 아침 회의를 한다. 미국 사람들은 폭탄이 떨어져도 회의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 아침 회의에서 한 젊은 직원이 “국장님께 질문이 있습니다”라고 손을 들었다. 국장님께서 말해 보라고 하니 그 젊은 직원이 "저 팀(Tim) (나의 미국 이름이 Timothy Choi인데 약칭으로Tim이라 불렀다)은 매년 7월에 한 달씩 휴가를 가는데 공평하지 않으니 나도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사실 항의할 만하다). 그러자 국장님께서 빙그레 웃으며 “당신도 선교 가면 그렇게 해 줄게” 라고 대답을 하니 회의하던 전 직원이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 후에는 어느 누구도 7월에 한 달씩 선교지에 나가는 것에 대하여 딴지를 걸지 않았다.

매년 그렇게 했더니 직장 노조에서 휴가를 개인이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외국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우수 직원으로 3번이나 선임되어 표창과 상금을 받았다. 또한 기독인으로서 직장에서 일할 때 믿음의 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또한 인정받았다. 때로는 영어가 부족하여 어려움이 있을 때 옆의 직원에게 물어보면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기도 했다. 40 명의 직원들 가운데 한국 사람(동양)은 나 혼자여서 더 귀여움(?)을 받은 것 같다.

아프리카로 떠날 때 전 직원들이 포옹하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부탁하고, 전례가 없는 직원 간의 모금을 해서 주기도 하였다. 여직원들은 꼭 안아 주면서 살아 돌아오라고 울며 부탁하였다. 그 우체국에서 26년 근무하는 동안 전에도 후에도 그러한 일은 없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했다.


* 편집자주 - 최상득 선교사는 1974년 미국에 이민하여 시카고 휄로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 오케스트라 담당, 시무장로로 해외선교 위원장으로 섬기다가 2005년 목사 안수를 받고 SMF(Silver Mission Fellowship) 선교회에서 과테말라로 파송되었다. 2007년과 2013년,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했으며, 음악 사역, 신학교 강의, 불우 어린이 돕기, SETECA 신학교 분교 설치 등 18년간 과테말라에서 사역하고 지난 2022년 12월, 시카고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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