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이야기 (12) 슈퍼바이저가 환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내게서 발견할 수 없는 채플린의 권위가 느껴졌다.

매주 화요일은 나에게 가장 긴 하루다. 오늘도 긴 심호흡을 하며 전쟁에 참전하는 심정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서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수업을 한 후,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 사이에 발생한 호출이다.

환자 방문을 위해 1층 CCU(Clinical Care Unit)로 가는데 호출기(Pager)가 울렸다. 코드 블루(Code Blue)다. 입원 환자의 건강에 변화가 생겨 응급 상황이라는 뜻이다. 병실에선 환자에게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심폐 소생술)이 행해지고 있었고, 의료팀 스태프들이 10명 넘게 병실 앞에 모였다.

60대 초반의 남자 환자였다. 병실 앞에 환자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걱정스러운 듯 서 있었다. 환자 치료가 의료팀의 몫이라면, 채플린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 가족에게 다가가 채플린이라고 소개하자 아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괜찮아요. 지금은 채플린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채플린이 ‘위로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론 ‘죽음의 사자’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가족의 의사를 존중하고 병실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침묵 기도를 드렸다. 잠시 후 기적이 일어났다. 감사하게도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모두 환한 미소를 나누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환자가 의식에서 깨어나서 한 말이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죠?” 그 순간 모두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상황 종료이다. 정말 다행이다.

저녁 8시, 다시 블루 코드로 호출기가 울렸다. ‘기적의 주인공’ 상태가 다시 심각해졌다. 환자는 저녁 9시가 넘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어느 사이 가족과 친지들이 많이 모였다. 환자의 아내를 만나 대화하며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 속에 경건함이 느껴졌다.

새벽 4시, 응급실 수간호사에게서 호출이 왔다. 블루 코드 환자의 경우는 심각하고 복잡한 상황이기 때문에 슈퍼바이저 채플린에게 연락해서 오게 하라고 했다. 인턴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단잠을 방해받은 슈퍼바이저가 30분 만에 나타났다. 수간호사와 함께 대기실로 갔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환자의 아내, 부모, 의료팀 스태프, 수간호사, 그리고 채플린이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의료팀 스태프로부터 환자의 상황 설명을 들었다. “수술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의료팀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이라 수술이 많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진전되는 대로 계속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궁금하신 것 있나요?” 가족들은 차분히 상황을 이해하며 수용하고 있었다.

의료 스태프가 떠난 후 슈퍼바이저가 환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내게서 발견할 수 없는 채플린의 권위가 느껴졌다. 병원에서 환자 가족을 위해 제공되는 커피와 빵을 가져다주며 지친 가족들을 위로했다.

아침 6시 30분, 다시 한번 슈퍼바이저와 수간호사와 함께 가족들을 방문했다. 수술은 계속되고 있었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족에게는 끝까지 침묵하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오전 7시 근무 시간이 끝나서 퇴근을 했다.

다음 출근 후 들은 소식은 결국 환자는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처음 심폐 소생술로 깨어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며 유머 있게 환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남편을 본 아내와 자녀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몇 시간 후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넘고 만 것이다.

가족들로부터 “그날 밤 위로해 주고 도와주어서 고마웠다”라며, 슈퍼바이저와 나의 이름을 언급해 감사의 이메일을 보내왔다고 전해 들었다. 슬픔을 초월해 도와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한 그들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이었다. 환자가 수술을 받게 되면 치유되고 살아날 것을 기대하는 게 당연지사다. 그런데 수술받다 죽게 되면 의료 사고는 아닌지 의심을 품거나, 의사에게 환자를 살려내라며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치고, 의사는 죄인이 된 듯한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유가족들은 수술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의료팀에게도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고 들었다. 아! 어디에서 그런 영성이 나오는 걸까?

* 최영숙 목사
현 제시브라운 미보훈병원 채플린 BCC (Board Certified Chaplain)
한신대 신학대학원 석사
시카고 신학 대학원 석사 및 목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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