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정 시인(작곡가, 수필가)

며칠 전 나의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에서의 주중 여성 예배 모임이 있었다. 비록 온라인으로 동참한 예배이긴 했으나, 열정과 눈물 섞인 설교자의 메시지는 내게도 많은 감동과 울림으로 전해져 왔다. 늘 그렇듯, 깊은 신학적 고찰과 영성이 깃든 설교자의 메시지는 분명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고 색다른 은혜뿐 아니라 올바른 제자도의 정신을 깨우쳐주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설교자마다 각기 다른 ‘달란트의 비유’의 참뜻에 대해서 또다시 재조명되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성경에 적힌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인 ‘달란트의 비유’의 의미를 묵상하게 되는 사순절 기간이 여느 때 못지않게 귀하고 은혜롭지 않을 수 없다.

설교를 듣던 중 어느 날, 동네 산책길에서 목격하게 된 한 장면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던가! 묵묵히 걷고 있던 나의 귓전에 어디선가 한 남성의 고함이 들려왔다. 적막함을 깨우는 듯한 불현듯 공중에 울려 퍼진 큰 소리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던 나의 시야에 저만치쯤 개 한 마리가 어느 집 안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집주인이 잠시 열어놓은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No, Come back here!’라고 소리치는 주인에게로 잽싸게 뛰어 달려가는 ‘복종내지 순종'하는 모습에서 ‘우리네 인생들과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순간 잠시 묵상하게 된 것이다.

한낱 동물에 불과한 개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순종하며 때론 충성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당연한 처사’로 간주하기 쉬운 사실이 아닌가. 하물며, 우리네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가?…’등의 심오한(?) 상념을 물리칠 수 없었다. 날마다 아낌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 외에 누가 또 있는가 말이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내어 주신 분, 우리를 사랑하사 영원한 형벌 대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 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무엇으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설교자마다 각기 해석이 다른 ‘달란트의 비유’를 또 다른 관점으로 상고해 보게 됨도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떻든 ’달란트 비유에 관한 설교자의 메시지의 핵심’은 ‘주인이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의 서로 다른 양상에 관한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 누구에게도 주인이 없는 삶은 분명히 없기에 ‘주인을 모르고 사는 삶’이라는 표현도 절대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고로, ‘달란트 비유의 정의’는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나(우리)와의 관계를 깨달으며 매일 매 순간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한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의 많고 적음의 양과 가치의 차이점이 아닌, 나의 영원하신 기업, ‘주님’이 친히 나의 달란트가 되시는 복된 삶을 얻음에 감사하며.

‘ 다 알아도 단 하나를 알지 못하면 다 모르는 것과 같고, 다 알지 못해도 단 하나를 알면 다 아는 것과 같다.”라는 또 다른 설교자의 메시지 한 대목이 선명히 오버랩되어 마음에 와닿는다. 실제로 이 세상이 주는 어떠한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무한한 기쁨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부터 기인함을 경험해 온 이들이라면 어찌 이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나(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복된 시간이 되길 이 아침 간절히 소망해 본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짓게 된 짧은 찬송 가사를 떠올리며.

 

 ‘주를 아는 기쁨’

주를 아는 기쁨 완전한 기쁨
세상 어떤 즐거움과 비할 수 없네
주를 아는 기쁨 영원한 기쁨
세상 어느 것과도 난 바꿀 수 없네

주와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그 길
어디서나 어느 때라도
내 일생 다 가도록 주 함께 하시리
주님 나를 지켜주시리
주 항상 나를 인도 하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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