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장로님 부부가 손주를 본 후로는 얼굴색이 달라졌습니다. 애 낳아도 베이비시터 노릇은 절대 안 할 거라던 권사님은 힘들다 툴툴거리긴 해도 주 3일은 만사를 제쳐놓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는 자기 사전에 없지 싶었는데, 이제는 “하비” 부르는 앳된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잠이 안 올 정도라며, 장로님은 며느리에게 영상 전화를 걸며 손주 바꾸라고 재촉합니다. 

한국 정치와 60년대 감성 콘텐츠를 공유하던 또래분들의 단톡방에는 손주 동영상을 올리며 외모의 우수성과 천재성을 자랑합니다. 이에 맞장구 쳐 주시는 친구분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애는 말이야~”하는 자랑 릴레이. 몇 번 이런 멘트들이 오가면 누군가 말합니다. “앞으론 100달러 놓고 얘기해.” 상급 버전도 어김없이 나옵니다. “100불 줄 테니 제발 손주 자랑 좀 하지 마.” 그리고는 한바탕 웃음이 뒤따르고...

나이 들며 인생이 무료해질 때 찾아온 새 생명, 그는 자신이 노력한 종족 보존의 위대한 열매입니다. 동시에 아들 때와는 달리 완벽한 사랑을 무한정 베풀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하는 도파민이지요. 그 충만한 기쁨과 삶의 활력을 자랑하는 것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와 자연 질서의 섭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자랑의 정도와 횟수가 심해지면 돈 놓고 얘기하라는 정중하고도 유머 있는 피드백을 듣게 됩니다. 모임 중에는 아직 “하비”, “함미”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 또는 경험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미 한참 전에 그 경험을 한 사람도 있지요. 그들은 “been there done that”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한두 번 맞장구는 쳐 주지만 계속되면 혼자만 대단한 척 요란 떨지는 말라는 생각이 그들 마음 한구석에 있습니다. 게다가 모임의 흐름까지 방해할 정도가 되면 불편한 감정까지 생길 수 있겠지요. 신선하고 신기하며 약간은 부럽기도 하고 맞장구쳐줄 정도가 손주 자랑의 내용과 횟수의 적정선이 아닐까요. 지나치면 모임에 방해가 되고 심한 경우엔 본인뿐 아니라 손주까지도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답니다. 

조심스럽게 “예수 자랑”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막 쪄낸 찐빵처럼 따끈따끈한 은혜의 체험자에게는 전하지 않으면(자랑하지 않으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은 절실함과 긴박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건드리면 터지고 마는 봉숭아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랑을 나눕니다. 문제는 그의 간증과 자랑이 예수가 아닌 자기 자랑일 때가 많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듣는 대상이 이미 크리스천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그리고 지금이 Post Christianity의 시대라는데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기쁨의 콘텐츠 보다 자랑의 방식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망과 기쁨의 이유에 대해 물어줄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상대방의 관심사를 먼저 살피는 배려심, 상대와 상황에 따른 표현 방식의 적절함과 절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 자랑의 목적과 효과를 증진하는 적절한 방법임을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방법론의 변화를 이야기하면, 신앙의 근본까지 의심하며 공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믿음 자체를 강조하는 종교의 영역이라 그런지 조금만 다른 이야기를 해도 이단, 삼단을 이야기하며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동시에 배타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대화의 문은 닫히게 되고 단절과 아집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19세기적 전도 방식과 20세기적 선교 방법론만으로는 21세기의 세상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변함이 없고 사명감도 흔들리진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차라리 돈을 줄 테니 입다물고 있으라”는 이야기까지는 듣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듣고 있는 지역도 있지만요.

* 편집자 주 - 곽성환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동 대학원,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바울사역원 PMI 원장이다. 유튜브로 매일 성경 묵상 프로그램 “일일텐”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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