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소 명

최초로 한국을 찾아왔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1832년(순조 32년)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古代島) 뒤편에 닻을 내렸던 로드 암허스트(The Lord Amherst)호를 타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 땅에 입국을 시도했던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목사이다.
그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의 피리츠(Pyritz)에서 태어나 18세때에 시를 읊어서 선교사가 되겠노라는 자기의 열망을 프러시아 국왕에게 호소할 만큼 정열적인 신앙가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경건주의의 요람지로서 근대 선교사들을 대량 배출한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가 동양 선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이미 중국에 와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모리슨(Robert Morrison) 목사를 영국에서 만나고부터였다.
구츨라프는 1826년에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선교회 본부의 승인없이 중국 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2년 후에는 이 때문에 선교회와 결별하고 독립적인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태국의 방콕으로 가서 그곳 원주민의 고유 의상을 입고 원주민과 어울려 살았다.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부인과 어린 딸을 잃고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되자, 그동안 중국인과 어울리면서 놀라울 정도로 중국어를 익혔던 그는 1831년 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1831년과 32년, 33년, 세 번에 걸쳐 중국 해안을 탐색했는데, 한국 서해안에 도착한 것은 두 번째 항해때인 1832년(순조 32년) 7월 17일,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아침이었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백령도에 닻을 내렸다가,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충청도의 원산도(元山島)로 접근해 왔다. 구츨라프는 침통하고 무표정한 한국인에게 모리슨에게서 받은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종교에 관한 말이라면 기겁을 하는 한국인과 대면하기 위해 그는 서양 문물과 지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였고, 여러 종류의 책과 직물, 감자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40일간 체류하면서 다량의 한문 성경을 전하였다. 특히 그는 순조 대왕에게 성경 두 권을 헌상하였다. 이렇게 한문성경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졌다.
그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주님께서 작정해서 짚어 주시는 날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이다.” 이것이 그의 선교 철학이었다.

주기도문 번역

승선했던 선박의 사정 때문에 그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40일밖에 한국에 체류할 수 없어서 갈망하던 한국 선교를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일은 그가 이루어놓은 역사적 공헌으로 꼽힌다.
어느날 그가 승선한 암허스트호에 문정차 홍주 목사 이민희 일행이 찾아와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어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구츨라프는 절호의 기회를 얻어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는 가운데 서생 양씨에게서 한글로 주기도문을 옮겨 받아 역사적인 한글 주기도문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최초의 성경 번역이자 주기도문의 첫 한글 번역이 되었다.
양씨는 주기도문 번역 도중 몇 번씩이나 자기 목에 손을 갖다 대면서 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는가를 실감케 하고 나라에서 금하는 이교(異敎)를 믿으려면 생명까지 걸어야 했던 당시의 살벌한 풍토를 말해 준다.

광명의 아침이...

암허스트호의 본래 목적인 교역이 와해되는 바람에 선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구츨라프 목사는 뱃머리를 돌리는 갑판 위에서 은자의 나라 한국을 돌아보며 눈물로 얼룩진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내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었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파했습니다. 선물로 증정한 성경을 코리아 국왕이 받아보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의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았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코리아 온땅에 퍼져 광명의 아침이 찾아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는 이 나라가 언젠가는 복음의 빛으로 인도될 것을 확신하면서 아쉬움을 남긴 채, 바람이 심하게 불던 8월 어느날 아침 서해안에서 출발하여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닐(Stephen Nill)이 말한 바와 같이 “성자이고 괴짜이며, 비전 가득한 꿈을 꾸는 사람, 성실한 개척자” 구츨라프는 1851년 중국에서 별세하였다.
구츨라프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 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정하는 데 있어 구츨라프 목사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테일러는 구츨라프 목사를 중국 내지선교회의 조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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