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선교사의 길

토마스(Robert J. Thomas)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교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1863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1863년 6월 4일 고향의 하노버(Hanover)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중국 선교사로 가는 조건으로 특별히 재학 기간 단축을 허가받아 안수를 받은 토마스는 갓 결혼한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7월 21일, 폴메이스(Polmaise)호로 출범했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20세였다.
그러나 토마스의 선교 노정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상해의 기후는 연약한 캐롤라인에게는 너무 무덥고 탁하여 아내는 자주 병석에 누웠고, 한 달도 못 되어 몹시 수척해졌다. 토마스는 생각타 못해 아내를 요양시킬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한구(漢口)로 떠났다.
그러나 기어이 비극은 닥치고 말았다. 토마스가 한구로 떠난 지 며칠 못가 그의 아내는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이역만리 상해의 병상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산 설고 물 선 타국에 와서 고된 선교사업에 열중하는 토마스 목사의 한쪽 팔이 되어 격려와 위로를 해주던 아내를 잃은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때 토마스 목사의 심경은 선교본부로 보낸 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내용이될 줄 몰랐습니다. ...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더 글을 써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아내를 사별한 아픔과 상해의 런던선교회 총무인 무어헤드와의 끝없는 불화가 겹쳐서 토마스는 어디든 가서 완전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교사 사직원을 제출하고 산동성 지푸로 이사하여 선교부와는 인연을 끊은 채 자급전도를 하고 있었다.
1865년 여름 어느날, 그는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조그만 어선 위에서 이상한 의복을 입은 두 노인을 보았다. 그들은 토마스 목사를 보자 매우 반가워하면서 한국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김자평 일행이었다.
토마스 목사는 그들을 동료 선교사이며 북중국 성서공회 책임자인 윌리엄슨 목사의 집으로 데려갔다. 김자평은 두 서양사람이 천주교 신부인 줄 알고서 기뻐하며 따라갔던 것이다. 집에 들어가자 김자평은 옷 속에 감추어둔 묵주와 십자가를 꺼내 보였다.
토마스 목사는 그들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 더욱 흥미를 느껴 여러가지 한국 실정을 물어 보았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문답도 해보았다. 윌리엄슨 목사가 차와 과자를 대접하면서 식사기도를 청하자 김자평은 머리를 숙이고 성호를 그으면서 엄숙하게 기도하였다.
한국인 신자를 만난 토마스 목사는 매우 기뻤으며 Korea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는 천주교와 예수교를 구분하여 설명을 하면서, 한국을 구원하며 한국인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종교는 예수교임을 역설하였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쾌활한 김자평 노인은 토마스 목사의 말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목례로 시인의 표시를 하였다.
이때 토마스 목사는 한국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결정을 윌리엄슨 목사에게 말했다. 윌리엄슨 목사는 그의 결심을 장하게 여기고 적극 찬성하면서 다량의 한문성경과 전도지를 주었다. 그리하여 토마스 목사는 김자평 노인에게 안내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으며 김 노인은 쾌히 승락했다.
토마스 목사는 선교부에 복직을 타진하고 그 회답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윌리엄슨 목사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 김자평과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갔다. 마침내 그들은 옹진 앞바다의 창린도 자라리(紫羅里) 근포에 도착했다.
그는 이 섬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며, 옹진 일대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약 2개월 동안 한문성경과 종교서적을 나누어 주었다.
이미 가을이 지나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서울로 올라가서 임금을 만나 선교 허락을 받아낼 작정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으로 향했으나, 불행히 큰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요동반도의 어느 바닷가에 닿아 그곳에서 육로로 산해관을 거쳐 지푸로 돌아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 선교에 대한 그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셔먼호를 타고(1)

한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으로 한국 선교 열망이 커진데다,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에 대한 아픈 추억이 깔려 있는 중국땅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토마스의 발길을 재촉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 그는 자신을 서양인 중에서 유일한 한국통이라고 자처하고 있던 터였다.
뜻밖에도 한국 전도의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이듬해(1866년) 가을, 교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에서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윌리엄슨의 뜻을 따라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편승하여 황해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서들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한테 환영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오르며 희망에 부풉니다... (런던 선교회의) 이사(理事)들이 이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인간의 아무런 과오와도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글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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