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소명

존 로스는 1841년 8월 9일 스코틀랜드, 닉(Nigg)에서 출생하여 글래스고우 대학을 졸업하고, 1862년 에딘버러 연합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했으며, 1868년부터 선교사를 지망했다.
1872년, 선교부는 그를 중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여 그해 3월 20일 목사 안수를 받고, 3월 25일 스튜어트(M. A. Stewart) 양과 결혼했다. 이들 신혼부부는 그해 늦은 여름 영국을 떠나, 8월 23일 중국 지푸 항에 도착하여 중국 개척선교사 윌리엄슨 목사의 안내를 받아 영구(營口)로 이주하였다. 어떻게 하면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효과적인 선교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중국문화연수에 골몰하던 로스 목사는 중국어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런데 그 해에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가 첫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주땅에다 묻은 그는 갓난아기의 양육과 선교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여동생 캐더린을 고향에서 데려와야 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미개척지를 물색하던 로스 목사는 봉천에 선교 본부를 두고 만주 선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중에도, 병인양요 이후 쇄국의 문을 크게 닫고 세계를 외면한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열의를 지니고 있었다. 같은 영국인 복음전도자로서 젊음의 뜨거운 피를 쏟으며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보자는 연민의 정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한국땅에 가장 근접한 지역에 오기 위해 이곳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쇄국정책 아래 있는 한국, 병인양요 이후 경계가 더 심해져서 서양인의 입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차라리 만주땅에서 한국인을 만나 그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통해 한국을 복음화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제1차 전도여행

그는 1873년 가을, 제1차 선교개척 여행길에 올랐다. 1개월여에 걸친 긴 여행은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 홍경을 거쳐 압록강 상류인 임강(臨江)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이 여행은 로스 목사가 한국 선교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스 목사는 이때 압록강을 건너려고 그곳 주민들에게 도강(渡江)과 월경(越境)의 안내자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을 뿐더러,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어서 멀리 Korea의 산천만 바라다보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통화현 부근의 산골인 한인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초산, 강계, 구성, 의주 등지에서 모여든 농민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인 한 사람을 사귀고, 그에게 몇 권의 한문 성경을 주고 돌아왔는데, 이때 뿌린 씨가 후에 열매를 맺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몇 해 뒤에 이 마을의 한국인이 봉천까지 로스 목사를 찾아와 성서번역사업에 가담하였다.
제1차 여행에서 한국땅을 밟아 보려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천 리가 넘는 위험한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압록강 안동 맞은편에 있는 고려문의 국제시장에 들러 자유롭게 한국인을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고려문(지금의 책문)은 만주의 압록강 하류 봉황성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고려문은 17세기 중엽 만주의 후금(後金)이 중원을 통일하고, 남만주 서북편 일대에 긴 울타리를 친 후 한국의 내침을 막기 위해 고려 문중의 육문을 설치하여 한국의 사신과 상인들의 왕래를 고려문으로 제한하였다.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의 유일한 관문이 고려문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으로 들어가거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고려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로스 목사는 고려문에 와서 중국인 여관에 여장을 풀고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서 한국인을 만났다. 고려문에 나온 한국인들은 서양인과 그들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였다. 

제2차 전도여행

로스 목사는 한국인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한국인들이 로스에게 서양의 문물에 대해 물어오는 바람에 한국의 풍물을 많이 들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은 로스 목사로 하여금 그 다음 해에 또 다시 고려문을 찾게 만들었다. 1874년 이른 봄 중국인 서기와 함께 2차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스 목사 자신이 나서지 않고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한국어 어학 선생을 찾았다. 한국인에 대한 일시적인 전도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먼저 번역할 계획으로 한국어 선생을 물색하였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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