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제2차 전도여행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상당한 지식이 있고 한문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로스 목사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의주 청년 이용찬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대단히 중요하다.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어와 한국의 풍속 등을 배웠다. 이때부터 로스 목사의 한국어 공부는 급진전하였다.
그는 이어서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 다섯 사람을 차례로 맞이하였다. 접근을 꺼려하는 그들에게 기독교를 권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그곳에 있는 선교사들과 세관 관리와 병원장의 어학 선생으로 채용하였다.
이들 청년 선비들은 절대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겠다는 처음의 악속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3년이 지난 후에야 그 완고한 마음을 풀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중의 네 사람에게는 1876년에 세례를 주고 서상륜에게는 1879년에 세례를 주었다.
그 후 1883년 서간도 한인마을 사람인 김청송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때까지 세례를 받은 한인이 모두 6명이 되었다.

한국어 성경 번역

이들 여섯 명의 한국인 초신자들을 데리고 한국어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업을 밀고 나갔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로스 목사는 한국인 상대의 전도를 위하여 여러 차례 서간도 한인마을을 찾아갔는데, 주로 김청송이란 그 지방 출신 전도인의 도움으로 초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경을 반포했다. 1884년 6월까지 34명에게 세례를 준 것을 비롯하여 그해 12월에는 75명에게, 1885년에는 104명에게, 1886년에는 100명에게, 이렇게 해서 만주땅에 온 이래 모두 6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어 한국교회의 토대를 닦아 놓았다.
로스는 봉천시 동문외(東門外)에 있는 동관교회(東關敎會)를 중심으로 하여 평생을 선교에 바쳤다. 그는 “70세에 직을 사임하고 고국에 돌아가서도 전도사업에 힘쓰기를 마지 않더니 뜻밖에 하나님의 정한 바 기약이 차서 1915년 8월 6일에 숨을 거두어 에딘버러 뉴잉턴(Newington)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비보를 들은 봉천 동관교회는 그 교회 정원에 기념비를 세웠다(碑文: 大英神學博士 羅君約翰蘇格蘭人也 於生一千八百四十一年 道學畢業後承順主旨 遠越重洋華傳道時三十一歲... 奉天市東關敎會堂).

“대영 신학박사 라군 요한은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1841년에 출생하여 신학을 마친 뒤에 주님의 뜻을 따라 멀리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전도하였으니,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교회 초창기에 황무지를 개간할 때 여러 가지 노고와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공이  이루어지고 기반이 서서 드디어 봉천, 요양, 홍경과 멀리 조선에까지 교회를 건설하니 신자의 수가 매우 많아졌다. 또한 고아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쳐서 많은 인물을 길러내었다. 아울러 성경 주석 등 약간의 책을 번역 출판하였으며, 신학교를 세워 신학을 가르쳐서 친히 시취하여 세운 중국인 목사가 열 사람이 넘었다. 75세로 서거하였으니 때는 1915년 가을이었다. 부음이 서편으로부터 오매 교우들이 듣고 사무친 애정에 울음이 쏟아지고 밤낮으로 잊을 길이 없어서 이에 찬하는 글을 써서 돌에 새겨 영원히 전케 하노라...”
만주 선교의 혁혁한 공로자인 로스 목사는 한국에 주재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한국 선교의 개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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