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소명

맥킨타이어는 1837년 7월 18일 스코틀랜드, 록 로먼드(Lock Romand) 지방 러스(Luss) 태생이다. 그는 에딘버러 연합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6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871년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한편 존 로스 목사는 1872년 8월 23일, 중국 지푸에 도착했다.
로스는 그해에 그의 아내가 첫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여 갓난아기의 양육을 위해 여동생 캐더린을 고향에서 데려왔다. 이때까지 미혼 총각이었던 맥킨타이어는 로스의 누이동생 캐더린과 결혼했다.

전도 여행

1873년 제1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맥킨타이어와 로스는 한만국경 압록강 상류 임강(臨江) 유역 이양자(裡陽子) 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여러 모로 한국 입국 계획을 세우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겁먹고 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국법이 엄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음해(1874년) 봄에 중국인 서기를 데리고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올라 고려문에 이르렀다. 한국인들이 서양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중국인 서기를 시켜 한국인을 자기 숙소로 데려오게 했다. 중국인 서기는 며칠 거리를 헤맨 끝에 한국 청년 이응찬을 만나 맥킨타이어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이응찬은 친구들의 눈이 무서워 귓속말로 응락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는 친구들이 여관에서 코를 골며 깊이 잠든 사이에 서편을 향해 떠난다는 짧은 글을 남겨놓고 여관을 빠져나와 맥킨타이어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아갔으며,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우장으로 갔다.
이응찬은 맥킨타이어의 어학선생이 된 뒤 1876년에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과의 만남

서상륜의 친구들, 의주의 네 청년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가 만주로 건너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소식이 끊어져서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서상륜은 친구들의 행방을 찾을 겸 늘 마음에 그리던 바깥 세상의 새 문화를 접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동네어른의 기대와 환송을 받으며 한약 행상의 봇짐을 등에 지고 광막한 만주 벌판을 향해 떠났다. 여러 날 후에 그는 영구(營口)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서상륜은 친구들이 나라에서 금지하는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는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왔다는 듯이 꽁무니를 빼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날로 심한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나중에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 선교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는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날마다 병원에 찾아와 지극한 정성으로 서상륜을 간호했다. 밤이고 낮이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돌보고 위로해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서상륜은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으며,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끝에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1879년 봄 어느날,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한국어 성경 번역

이때 누가 먼저 한글 성경번역을 제창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맥킨타이어는 세례 받은 한국인 초신자들과 함께 한글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을 밀고 나갔다.
기독교에 몸 바치기로 결심한 서상륜은 네 친구들과 같이 성경을 번역하는 일, 특히 성경 출판을 위해 목활자(木活字)를 파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목활자를 파는 각인(刻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재정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1881년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다 설치하였고, 한국인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활자는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연활자(鉛活字)로 바꾸어 그해 우장을 거쳐 봉천으로 이송되었으며, 중국인 인쇄공과 한국인 식자공 김청송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최초의 한글 성경이 출판되었다.
“1879년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보고에 따르면 누가복음은 1878년까지 로스 목사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등의 공역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해에 로스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게 되어, 맥킨타이어 목사가 그 업무를 맡아 한국인 번역자들과 같이 다시 구구절절 재수정을 하였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한글성서번역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한글성서번역은 성경반에서 진행되었는데, 먼저 한국인 번역자들이 나와 함께 한문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나는 다시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하였다.’... 1879년 영국으로부터 돌아온 로스 목사는 맥킨타이어 목사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일일이 재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했다.”
존 로스 역 한국어성경[Ross Version]의 원본은 중국어성경을 비롯하여 헬라어성경과 두 가지의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 English Revised]의 네 가지였으며, 엄밀히 말해 이 성경은 두 선교사와 여섯 명의 한국인 초신자들의 공동번역이지만, 성경 반포의 공헌으로 말한다면 서상륜 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882년 누가복음의 뒤를 이어 요안내(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의 신약전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79년에 <한국언어론(Notes on the Corean Language)>을 썼고, 1880년에는 <한국의 역사, 상태,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이란 책을 런던에서 간행했다. 맥킨타이어 목사는 1905년 지푸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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